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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토지제도에서 실학 연구까지 중요한 성과 남기셨죠"

한겨레 입력 2022. 01. 18. 18:36 수정 2022. 01. 19.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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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오후 8시, 우석 김태영 교수가 노환으로 돌아갔다.

김 교수는 1971년 이래 30여년간 경희대에서 사학과 교수로 후진을 양성했고, 대학원장과 인문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냈으며 정년퇴임 후에는 명예교수로 활동했다.

그 뒤 실학 및 다산 연구에 남긴 공적으로 2006년에는 다산학술문화재단으로부터 제7회 다산학술상을 받았고, 2013년에는 이우성 교수가 대표로 있던 (재)실시학사에서 수여하는 제3회 벽사학술상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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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우석 김태영 선생을 보내며

2018년 경희대 총민주동문회 창립 30돌 기념식에서 축사하는 고 김태영 명예교수. 경희대 총민주동문회 제공

조선 사회경제와 사상사 연구로

1회 단재상과 다산학술상 등 수상

1985년 ‘목민심서’ 6권 완역 이끌어

형의 학문과 인품 길이 빛날 터

저 세상에서 부디 영복 누리시길

지난 11일 오후 8시, 우석 김태영 교수가 노환으로 돌아갔다.

김 교수는 1971년 이래 30여년간 경희대에서 사학과 교수로 후진을 양성했고, 대학원장과 인문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냈으며 정년퇴임 후에는 명예교수로 활동했다.

김 교수는 <과전법 체제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줄곧 조선시대의 사회경제 및 사상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전기 토지제도사 연구>(1982)를 간행한 뒤 실학 연구에 집중해 <실학의 국가개혁론>(1998)을 간행했고, 조선시대 성리학도 폭넓게 연구해 <조선 성리학의 역사상>(2006)도 남겼다.

우석은 이런 학문적 업적으로 여러 학술상을 받았다. <조선전기 토지제도사 연구>로 1986년에는 한길사가 단재 신채호의 학문과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제1회 단재상을 받았고, 1998년에는 봉직하고 있던 경희대로부터 제1회 미원학술상을 받았다. 그 뒤 실학 및 다산 연구에 남긴 공적으로 2006년에는 다산학술문화재단으로부터 제7회 다산학술상을 받았고, 2013년에는 이우성 교수가 대표로 있던 (재)실시학사에서 수여하는 제3회 벽사학술상도 받았다. 이런 수상은 모두 고인의 학문적 업적과 사상적인 동향을 가름할 수 있다.

필자가 고인과 교제를 나누게 된 것은 다산연구회에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번역하는 일에 같이 참여하면서부터다. 다산연구회는 1970년대 중반 한국사와 사회경제사 및 한문학을 전공하는 서울 거주 대학 교수들이 벽사 이우성 교수를 중심으로 조직한 모임이었다. 당시 활발했던 사회경제사 연구에서 자본주의 맹아론과 한국사의 주체적 근대화의 문제가 크게 대두하자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주목받고 있었다. 여기에 늦어도 다산 서거 150주년인 1986년까지는 목민심서라도 번역해 내놓아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다산연구회의 목민심서 강독은 1주일에 한 번씩 진행됐고 방학 때는 며칠씩 합숙도 했다. 매번, 준비해 온 멤버가 중심이 돼 원문을 읽고 해석하고 토론하는 순서로 진행하며 원고를 완성해 갔다. 평소 과묵한 우석은 토론이 벌어지면 자신의 ‘조선시대 토지제도연구’에서 터득한 이론과 문헌상 전거 등을 들어 적극 참여했다. 다산연구회는 거의 10년의 목민심서강독을 통해 1985년 첫 완역본 6권을 <역주 목민심서>(창비)로 간행했다. 우석은 목민심서 강독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지평을 더 넓혀 ‘유형원의 국가개혁안’, ‘실학의 국가개혁론’ 등 연구를 이어가 실학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목민심서강독을 통해 다산연구회원들은 부인들까지도 퍽 친숙하게 되었다.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자 연구회 멤버 중 6명이 해직되었고 남은 이들도 기관에 잡혀가 고초를 겪었다. 그런 중에서도 해직동료들을 위한 부조를 잊지 않았다. 지금은 회원 15명 중 절반이 넘는 여덟이 먼저 가고 일곱이 남았는데, 우석의 귀천은 그 분계점이었다. 우석 형! 그대의 학문과 인품은 길이 빛날 터이니 이제 저 세상에서 부디 영복 누리시기를 바라오.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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