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점입가경, 일본의 혐한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2022. 1. 2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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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일본의 혐한 풍조가 점입가경이다. 혐한이 하나의 풍조가 된 지 오래지만, 한국 때리기가 ‘장사’가 되자 명색이 언론이라는 매체들까지 노골적으로 혐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어느 종합잡지는 한국에 대해 ‘격분과 배신’이라는 표현을 썼고, 또 다른 주간지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인의 병리라는 내용의 기사까지 내보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일본의 대표적 언론 아사히신문이 지난 16일자에 ‘혐한과 미디어, 반감 부추기는 풍조를 우려한다’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하며, 혐한 보도에 맹공을 퍼부었다. 아사히는 한국인을 싸잡아 ‘병리’ 운운한 것은 민족차별이라며, 판매 촉진이나 시청률을 목적으로 이런 보도를 하는 것이 언론이라는 공기(公器)가 할 일인가라고 비판했다. 이 신문은 앞서 10일에도 ‘재일한국인의 피해, 증오범죄를 용서하지 말자’는 사설을 실었다. 재일한국인들의 집단거주지에 대한 방화, 민단 건물 시설의 파손 등을 규탄하며 철저한 수사와 처벌을 촉구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요즘 상황을 보면, 오랫동안 한국에 대한 여론을 주도하며 일본의 양식을 대변하던 아사히신문이 고립되는 모양새다. 그만큼 많은 일본인들이 혐한에 휩쓸려 들어가거나, 무관심한 채로 있다는 얘기다. 최근 기막힌 얘기를 들었다. 나는 몇 해 전부터 팀을 만들어 도쿠가와(에도) 시대에 관한 명저들을 번역하는 작업을 해왔다. 현대 일본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도쿠가와 사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식은 너무 부족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교양시민들이 이 시대에 접근할 수 있는 한글 책이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학에서 일본사 수업에 쓸 교재조차 마땅치 않은 지경이다. 다행히 취지를 이해하고 지원을 자청한 독지가도 만나 의욕적으로 출발했다. <에도시대란 무엇인가> <에도성(江戶城)> <에도시대를 생각한다> 등 학술적 교양서이면서도 일본에서 많은 독자를 확보해 왔고, 우리 독자들에게도 일독을 권할 만한 책들을 선정하여 애써 번역을 마무리지었다. 물론 이런 책 출판에 선뜻 나서는 국내 출판사가 거의 없어 애를 먹었다. 그러나 다행히 ‘빈서재’라는 신생 출판사가 출혈을 각오하고 출판 결정을 내려주었다. 우리 독서시장에도 이제 ‘도쿠가와 시대 명저 시리즈’ 정도의 책들도 나오겠구나! 뿌듯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일본 출판사들이 한결같이 저작권 교섭에 난색을 표하거나 아예 회답을 안 하는 것이었다. 어떤 유명 출판사는 이미 고인이 된 저자의 부인이 한국 출판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를 댔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사정을 물었더니 갑갑한 얘기를 들려줬다. 그 부인이 한글로 번역될 경우 ‘天皇’을 천황이라고 번역하는가, 일왕이라고 번역하는가 묻더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천황으로 번역할 경우 한국에서 큰 문제가 생겨 남편의 명예에 누가 될까 걱정된다고 했단다. 한국의 미디어에서는 일왕이란 말을 쓰지만, 그간 학계의 일본사 번역에서 天皇을 일왕으로 번역한 일은 거의 없었다(호칭 문제는 2021년 5월13일자 본 칼럼 ‘천황인가, 일왕인가’ 참조). 이 부인에게 한국은 북한쯤 되는 나라인 것이다. 내게는 일본의 혐한 분위기를 상징하는 사건처럼 느껴졌다.

이 말도 안 되는 유가족의 오해를 설득하고 일을 진행시켜야 할 출판사는 이 부인의 말을 전하며 더 이상의 교섭을 회피하려 했고, 다른 출판사들도 교섭 메일에 회신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정치·외교적인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학술서를 이웃 나라의 믿을 만한 연구자들이 번역하겠다는데(‘번역해주겠다는데!’가 솔직한 심정), 이에 냉담한 일본의 유명 출판사들을 나는 지금도 납득할 수 없다. 부디 혐한이나 한·일관계 뭐 이런 게 아니라, 차라리 시장성이 없다든가 하는 다른 ‘장삿속’ 때문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는 정말 이러지 말자.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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