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겨레

[ESC] "쩔어가 무슨 뜻이죠?"..지구 반대편에서 '아미'가 물었다

한겨레 입력 2022. 01. 21. 14:06 수정 2022. 01. 21. 14:16

기사 도구 모음

음성 기사 옵션 조절 레이어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ESC : 노동효의 지구 둘레길]노동효의 지구 둘레길 파라과이
남미 한가운데 내륙국 파라과이
방탄소년단 팬 도움 받아 여행
현지인들만 아는 축제장 가고
그들 문화·역사 깊이 알게 돼
산이그나시오 투우 축제장의 대관람차에서 본 전경. 노동효 제공

“쩔어가 무슨 뜻이죠?”

남미 한가운데 내륙국 파라과이에 도착한 지 사흘째, 아순시온의 카페에서 만난 청년이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비티에스(BTS)의 곡명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을 떠난 지 오래, 해외에서 비티에스란 이름을 처음 들었던 터라 어리둥절했다. “비티에스?” 고개를 갸웃대자 상대가 “음……” 하고 생각을 곱씹다가 갑자기 표정이 환해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방탄…” 그제야 알아채곤 동시에 소리쳤다. “방탄소년단!”

필자가 아순시온에서 묵었던 호스텔의 마당. 노동효 제공

남미 여행객이 가장 덜 찾는 국가

동남아시아 여행 중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투애니원(2NE1), 엑소 팬을 만나고 빅뱅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광경은 숱하게 봤지만 파라과이에서 한국 아이돌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두 주먹 쥐고 말 타는 시늉을 하며 “강남스타일~~!”을 외치는 남미인을 만난 게 다였으니까. 공영 통신사 직원인 이네스는 휴일에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게 낙이라고 했다. 〈시크릿 가든〉, 〈천국의 계단〉. 한국 드라마에 이어 비티에스에 빠져들면서 한글을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파라과이엔 여행 왔나요?” 그의 질문에 여행작가라고 밝히고 애로사항을 털어놓았다. “파라과이 대부분 숙소가 온라인 예약이 되지 않고, 무엇보다 정보가 부족해서 어디를 어떻게 여행해야 할지 막막해요.” 파라과이는 남미 대륙을 여행하는 외국인이 가장 덜 찾는 국가. 영문 여행안내서에도 정보가 많지 않았고, 남미를 다룬 한국어 여행안내서의 경우엔 파라과이를 누락하기 일쑤였다.

“국영 사이트가 있긴 한데…내가 도와줄게요. 일단 이번 주말엔 엠보스카다로 가세요. 아프리카계 파라과이인이 벌이는 축제를 보게 될 거예요.”

“과라니족(파라과이 원주민)이 아니라, 아프리칸이라고요?”

“소수이긴 하지만 파라과이에도 노예로 끌려왔던 아프리카인의 후손들이 살아요. 유럽인은 파라과이의 광산과 농장에서 일을 시키기 위해 그들을 데려왔어요. 18세기 말엔 파라과이 인구의 10%가 넘을 정도였죠. 그들 대부분이 엠보스카다에 정착했어요.”

이네스와의 만남으로 주말에 어디로 갈지 방향이 정해졌다. 추천에 따를 거라고 했더니 자신도 주말여행차 오겠다고 했다.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작별인사를 하려는데 이네스가 깜빡했다는 듯 다시 물었다. “참, 쩔어가 무슨 뜻이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를 찾아봤다. ‘쩔어’(DOPE). 영어 제목 도프는 ‘환각제’를 뜻하는 은어이자 ‘멋짐의 최상급’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그렇긴 해도 한국어 ‘쩔어’의 복합적인 뉘앙스를 스페인어로 어떻게 설명하지? 작업하며 땀에 ‘쩔어’ ‘몰아지경’에 이를 때, 몰두하는 자신이 너무나 멋져서 외치는 ‘쩔어!’ 장기투숙객 마리오가 내 노트북 화면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비티에스잖아!”

“비티에스를 아니?”

“네 나라 뮤지션이잖아? 칠레서도 유명해! 쩌, 쩌, 쩔어!”

스페인어로 얘길 나누다 갑자기 튀어나온 한국어에 기분이 묘했다, 이거 참 쩌는군!

본격적인 축제는 주말에 열리지만 금요일 오후에 퍼레이드가 있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엠보스카다에서 내려서 시장 앞으로 가면 미나스행 버스가 있어요. 그걸 타고 산프란시스코 솔라노 성당 근처에서 내리면 돼요.” 이네스에게서 받아 적은 대로 버스를 갈아타며 미나스에 도착했다. 작은 마을이었다. 정류장 앞 식당 종업원에게 묻고 물어 간신히 숙소를 잡았다.

깃털 옷을 입고 산프란시스코 솔라노 축제에 참여한 아이들. 노동효 제공
깃털 옷을 입은 축제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젊은이들. 노동효 제공

머리부터 발끝까지 깃털

황혼 무렵의 성당 앞길, 프란시스코 솔라노 성인의 조각상을 앞세우고 북 치는 행렬이 다가왔다. 퍼레이드 참가자는 어른부터 아이까지 다들 기괴한 형상의 가면을 썼는데 복장이 무척 특이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깃털로 뒤덮인 ‘버드맨’ 같았다. 강렬한 음악과 더불어 지금껏 경험 못 한 시각적 충격이었다. 프란시스코 솔라노 성인의 상징물을 성당에 안치하면서 퍼레이드가 끝났다.

프란시스코 솔라노는 스페인 출신 수도사로 1589년 남아메리카에 도착했다. 바다 폭풍에 선박이 해안에 좌초하자 선원과 승객은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 그는 묶여 있는 아프리칸 노예들 곁에 남았다. 사흘간의 큰 파도가 가라앉은 후 선원들이 수도사를 찾으러 왔다. 그도 노예들도 무사했다. 언어와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남미의 다양한 원주민 언어를 익혔고, 원주민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곤 했다. 임종한 지 백 년이 지나 그는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다음날의 행사를 위해 주민들이 길 변에 리본을 달고 풍선을 매다는 사이 해가 저물었다. 밤새 주민들은 천막을 치고 놀이기구를 설치하며 축제를 준비했다. 날이 밝은 후 나들이를 온 이네스를 만나 함께 성당으로 갔다. 어른들은 서고 깃털 옷을 입은 아이들은 긴 의자에 조르르 앉아 야외 미사에 참석했다. 공식 행사가 끝나자 아이들은 회전목마를 타러 달려갔고 어른들은 천막 식당에 앉아 음식과 술을 들이켰다. 우리도 숯불구이와 음료를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두번째 만남이라 우리는 말을 놓기로 했다. 나는 어설픈 스페인어로 ‘쩔어’의 복합적인 의미를 간신히 설명한 후 고개를 끄덕이는 이네스에게 물었다. “비티에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뭐니?”

이네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국 아이돌이 잘생기고 춤 잘 추는 건 비슷비슷하지만, 비티에스는 특별해! 데뷔 때부터 나온 앨범을 차례대로 들으며 진정성, 솔직함에 매료됐어. 아, 이들은 만들어진 노래를 부르는 아이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노래로 만드는 뮤지션이구나! 그래서 가사 하나하나가 궁금해지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찾게 돼. 가령 ‘마 시티’(Ma City)에 나오는 518처럼.”

“518이 뭔지도 아니?” 내가 묻자 이네스가 대답했다. “성당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교도소가 있어. 정치범을 가두던 곳이야. 파라과이도 군인이 독재하던 시절이 있었어.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는 1954년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하고선 1989년까지 통치했어. 계엄령을 내려 집회와 시위를 금지했고, 재판 없이 누구든지 체포 구금했지. 계엄령은 90일마다 연장되어서 그가 축출될 때까지 35년간 이어졌어. 수많은 시민이 감금되고 죽었지. 그런 경험이 있기에 한국의 5·18을 금세 이해했고 가슴 아팠어.”

이네스는 헤어지기 전 다음 여행지로 산이그나시오를 추천했다. 파라과이식 투우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며칠 후 축제일에 맞춰 산이그나시오로 갔다. 나를 제외하면 외국인 여행자를 찾아볼 길 없는 소도시였다. 호스텔엔 투우를 보러 온 파라과이인들로 가득했다. 숙소 주인이 낯선 동양인의 방문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투우 경기장이 어디죠?” “저 음악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가면 됩니다.” 음악 소리를 따라가자 대관람차, 나무토막으로 만든 회전목마 등 투박한 놀이기구들 사이로 투우 경기장이 보였다. 해가 저물고 행사가 시작되었다. 파라과이식 투우는 스페인 전통 투우와 달리 소와 묘기를 부리는 기예에 가까웠다. 망토를 흔들어 소를 자극하다가 소가 달려들면 점프를 해서 올라타는 식, 말하자면 헐크 호건이 주름잡던 시절의 레슬링쇼 같다고나 할까? 아버지 등에 올라타 투우를 관람하는 아이들은 눈을 반짝였고, 어른들은 경기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투우 축제장에서 로데오 놀이기구를 타는 소년. 노동효 제공
파라나 강변 연날리기 행사에 등장한 초대형 오징어연. 노동효 제공

울타리 넘어 날아오른 청춘

이네스는 파라과이 각지에서 열리는 축제와 명소를 차례차례 알려주었다. 마치 광양 매화, 구례 산수유, 진해 벚꽃, 선운사 동백, 봄꽃 피는 절정기에 맞춰 일정을 알려주듯이. 비티에스의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아낌없이 도움을 주던 이네스의 추천을 따라 도시를 이동했고, 덕분에 나는 파라과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더 깊이 알 수 있었다. 방탄소년단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방탄소년단은 데뷔 초 일산, 광주, 부산, 대구 등 지방 출신임을 사투리 랩으로 드러내고, ‘빅3’가 아닌 중소 엔터테인먼트사의 아이돌이라는 상황을 뛰어넘고, 아시아 작은 나라 출신의 뮤지션이란 한계를 거부하고, 세계 중심에 우뚝 섰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울타리 넘어 날아오른 청춘. 비티에스 소식을 들을 때면 비티에스를 가족처럼 여기던 지구 반대편의 엠제트(MZ)세대, 이네스가 떠오르곤 한다.

‘언론과 어른들은 의지가 없다며 우릴 싹 주식처럼 매도해 / 왜 해 보기도 전에 죽여 걔넨 / 에너미 에너미 에너미 / 왜 벌써부터 고개를 숙여 받아 / 에너지 에너지 에너지 / 절대 마 포기 / 유 노우 유 낫 론리’(BTS의 ‘쩔어’ 중에서)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