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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고국방문, 각지에서 연설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

김삼웅 입력 2022. 01. 2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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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ㆍ1혁명에 이어 신간회운동 등 국내의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그는 해외 한인의 민족교육운동의 일환으로 하와이에서 활동하다 1931년 6월 4일 하와이학생 모국방문단을 이끌고 잠시 귀국하였다.

그가 떠나있던 시기 국내에서는 총독부의 폭압 속에서도 1929년 11월 3일 식민지배와 노예교육에 반대하여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국내의 사정이 갈수록 암담하고 어느 것 하나 어렵지 않는 일이 없었지만, 하와이에 벌여놓은 사업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믿고 다시 못올 지 모르는 조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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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 36] 오랜만에 만난 동지들은 여기저기서 불러냈다

[김삼웅 기자]

 민족대표 박동완
ⓒ 자료사진
 
3ㆍ1혁명에 이어 신간회운동 등 국내의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그는 해외 한인의 민족교육운동의 일환으로 하와이에서 활동하다 1931년 6월 4일 하와이학생 모국방문단을 이끌고 잠시 귀국하였다. 3년여 만이다.

두고 온 가족이 보고 싶고, 병세가 깊어져서 쉬고 싶고, 더불어 고국산천과 동포ㆍ동지들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속내와는 상관없이 오랜만에 만난 동지들은 여기저기서 불러냈다. 강연 요청이었다. YMCA(조선기독교청년회)에서 <재류 재국동포의 근황>이란 연재로 연설한 것을 시작으로 목요강좌와 일요강좌를 잇따라 맡았다. 주제는 <재국조선인의 신앙생활>등이었다. 

국내에서 소속이었던 정동교회의 일요강좌도 하였는데, 주제는 <인생생활의 3요소>였다. 이런 일정이 국내 신문에 빠짐없이 보도되면서 그의 일정은 더욱 바빠졌다. 자신이 주필로 일했던 <기독신보>에는 1931년 6월 17일부터 9월 2일까지 <하와이는 낙원이란다>는 제목의 글을 연재하였다.

연재한 글에서는 하와이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면서 이곳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단체 등도 비교적 소상히 전하였다. 연재 마무리 부문에서 한인 2세들이 우리말과 글을 모르는 것을 안타까와하면서 동포들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글에는 이런 내용도 담겼다.

"조선 사람의 피를 가지고 조선 말을 알지 못한다면 그에 더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으랴."

그가 떠나있던 시기 국내에서는 총독부의 폭압 속에서도 1929년 11월 3일 식민지배와 노예교육에 반대하여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학생운동은 일제가 서울에서 2개연대 병력을 급파하여 학생들을 체포하는 등 강압에도 각계로 파급되고 학생들은 '일본제국주의 타도'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과 시위를 계속하였다.

박동완이 귀국한 시기인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이 일어났다. 일제강점기 많은 농민들이 식민정책과 가난을 벗어나고자 만주로 건너갔다. 많은 농민이 만주에 정착함에 따라 중국 농민과 갈등이 생겨났다. 중국 농민들은 '일본 국민'인 한국인들을 일본의 앞잡이로 생각하고 증오하는 경우도 있었다. 

길림성 만보산에서 한국 농민이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수로 공사를 시작하자, 400여 명의 중국인이 농기구를 들고 몰려와 한인 농민을 몰아 내고, 수로를 덮어 버렸다. 7월 2일 장춘의 일본 영사관이 제국신민(한국인) 보호라는 명분으로 경찰을 출동시키자, 중국 측도 경찰을 출동시켜 양국 경찰이 충돌함으로써 만보산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사상자가 없었는데도 이 사건을 만주 침략의 구실로 삼기 위해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러한 모략 선전이 국내에 그대로 전해지면서 한국인의 민족 감정이 격앙되어 전국에서 중국인 습격사건이 일어나 100여 명의 중국인이 사망하고 몇 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각 사회단체는 중국인 습격을 중지할 것을 호소했다. 

사회 일각에서는 엉뚱하게 박동완의 연관설을 제기하였다. 그가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이끌었던 전력 때문이었을 것이지만 생뚱맞은 억측이었다. 그는 기독교 목사로서 사해동포 정신일 뿐 모해나 계략 따위에는 성격상 걸맞지 않았다.

그는 3개월 정도 국내에서 머물다 다시 하와이로 돌아왔다. 국내의 사정이 갈수록 암담하고 어느 것 하나 어렵지 않는 일이 없었지만, 하와이에 벌여놓은 사업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믿고 다시 못올 지 모르는 조국을 떠났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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