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잠재적 가해자'론'이라니

나윤경 연세대 문화인류학과교수·전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 2022. 1. 24.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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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잠재적 가해자‘론’이라니…

※이 글은 경향신문 1월 22일자 칼럼 ‘이범의 불편한 진실’에 대한 반론 입니다.

공공기관 종사자에게 가장 힘든 업무 중 하나는 민원 처리일 것이다. 물론 그중에는 “인도에 주차된 자동차를 치워달라”는 것처럼 신속히 처리해야 마땅한 ‘민원다운’ 민원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민원은 시민에게 허용된 권리 수준을 뛰어넘는, ‘민원주의’를 장착한 갑질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인지 몇 년 전부터 공공기관에 전화를 걸면 담당자와 통화하기 전에 ‘직원에게 폭언이나 욕설을 삼가라’는 취지의 안내가 길게 나온다. 그 안내는 전화 건 사람을 확인도 하기 전에 응대하는 직원을 인격적으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내심 불쾌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직원들이 세금으로 급여 받는다는 점을 악용해 과도한 ‘주인의식’을 행사하는 이들을 경계하려는 ‘궁여지책’이라는 것을 알기에, 소통이 원활치 않을 때조차도 나는 폭언과 욕설을 퍼붓는 ‘진상’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드러내며 직원들을 안심시키려 한다. 이런 노력이 그들이 매일 겪어내야 하는 감정노동을 덜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임을 나와 대다수 시민은 알고 있기에 그렇다.

다만 공공기관뿐만이 아니다. 예컨대 개인병원에서조차 벽면마다 ‘의료진은 환자와 함께 질병과 싸우는 누군가의 가족이기에 그들을 존중하라’는 취지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환자 개개인의 됨됨이도 모르면서 붙인 안내 형식의 ‘지시’이지만, 여러 매체를 통해 의료인들이 환자나 그 가족에게 당하는 모욕의 수준을 알고 있기에 ‘착한 환자’가 되고자 때론 거만하고 퉁명스런 의료인에게조차 나는 무례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비행기나 기차 여행을 할 땐 어떤가. 출발 직전 여행의 기쁨을 음미하려는 순간, ‘승무원에 대한 성희롱과 성추행은 법에 저촉되는 행위’임을 상기시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페미니스트이고, KTX 승무원들의 노동권을 위해 싸우기도 했지만, ‘감정노동’ 개념이 비행기 승무원의 노동을 토대로 만들어졌던 만큼 나는 말과 행동으로 그들에게 꽤 ‘괜찮은’ 승객이 되고자 노력한다.

언급한 공공기관의 전화 안내음은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극소수의 ‘갑질러’들 때문에 민원인 모두를 ‘잠재적 가해자’로 보기로 하고 취해진 조치다. 공공기관의 모든 직원이 민원주의자 전화를 받는 것도 아니고, 민원성 전화를 하는 모든 이들이 갑질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직원들의 노동권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병원에 붙인 벽보도, 비행기와 기차에서 나오는 안내 방송 또한 마찬가지다. 이런 시도들이 썩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의 ‘기분(기분권)’보다는 노동자 누구에게나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일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기에 나와 대다수 상식적인 시민들은 그 ‘기분 나쁜’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최근 야당 대선 후보가 여성가족부폐지를 약속하자 떨어지던 지지율이 올랐다. 이에 진보쪽으로 보이는 논객이 야당 후보의 ‘무고죄 처벌강화’라는 황당한 공약을 ‘영리’하다고 칭찬하더니, 여당에 ‘잠재적 가해자론’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등을 처방했다. 여가부 산하기관이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몬다는 것은 왜곡이자 거짓 주장임을 지면을 통해 여러 번 밝혔는데도 이제는 진보쪽에 의해 잠재적 가해자‘론’으로 둔갑해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또 다시 구구절절 설명하느니 최근 갖게 된 질문 하나를 해보려 한다. 언급했듯, 대다수 시민이 노동권 보호를 위해 안내음과 벽보, 안내방송으로 나오는 직원에 대한 갑질과 성희롱·성추행에 관한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아들이는데, 남성에 의한 성폭력이 이렇게 자주 발생하는 사회의 ‘어떤’ 남성들은 왜 성폭력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못 견딘다는 것인가. 대체 왜?

나윤경 연세대 문화인류학과교수·전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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