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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시평]기적의 순간

신민영 법무법인 예현 변호사 입력 2022. 01. 26.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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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국선전담변호사로 일하던 시절의 일이다.

사무실로 걸려오는 전화는 사무실 직원분들이 받아서 용건을 확인하고 변호사들에게 연결해주는데 하루는 직원분들이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일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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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영 변호사

몇 년 전 국선전담변호사로 일하던 시절의 일이다. 사무실로 걸려오는 전화는 사무실 직원분들이 받아서 용건을 확인하고 변호사들에게 연결해주는데 하루는 직원분들이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일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설마 일하기 싫어 수화기를 내려놓은 건가?' 살금살금 뒤로 다가가 물어보려던 순간 이유를 알아버리고야 말았다. 수화기 너머로는 웬 아주머니가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스피커폰을 켜놓은 듯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직원분에게 이유를 물으니 내가 국선변호를 해야 하는 피고인이란다. 법원에서 나를 국선변호인으로 선정해주면 직원분들이 피고인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약속을 잡는데, 이 아주머니에게 전화했더니 대뜸 "니들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어? 니들 ○○○(사건 피해자 이름)이랑 한 패지?"라고 하고는 그때부터 숨도 쉬지 않고 욕설을 반복했다고 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궁금해서 수화기를 귀에 대보았더니 잔뜩 갈라져 꺽꺽거리는 목소리로 "니들의 정체를 내가 모를 줄 알고" 따위의 단순한 문장을 숨도 쉬지 않고 반복하고 있었다. 담당변호사인 내가 직접 통화하면 누그러질까 싶어 수화기를 집어 들고 자기소개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전화를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고는 쌓여있는 사건 기록 속에서 아주머니의 사건을 찾기 시작했다. 동네 포장마차 주인이 자기 흉을 보고 다닌다고 난동을 부린 사건이었다("이 아주머니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포장마차 주인의 진술도 적혀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싶어 전화를 끊었지만 이내 바로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으면 소리 지르고 받지 않으면 하루 종일 전화벨이 울리는 이틀이 흘러갔고 결국 법원에 국선변호인 사임서를 접수할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다른 전화가 불통상태였고 어차피 아주머니에 대한 변호가 불가능하기도 해서였다.

며칠이 지나서 다른 재판 때문에 법정을 갔는데 재판장이 익숙한 이름을 호명했다. 도저히 잊지 못할 그 아주머니의 이름이었다. 마침 그 시간에 아주머니의 재판이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판사님이 고생 좀 하겠구만.' 이번엔 과연 무슨 욕을 하려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려는 순간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저는 결단코 가게에서 소리를 지른 적이 없습니다. 포장마차 주인이 저를 모함하는 것입니다." 콜센터 직원 같은 하이톤의 목소리에 담긴 실로 멀쩡한 대답이었다. 아주머니의 패악질을 직접 경험한 터라 그 호소가 새빨간 거짓말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아주머니의 거짓말이 아니라 실로 멀쩡한 아주머니의 태도였다. 광인이 정신을 차리는 기적의 순간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될 줄이야. 손을 들고 "판사님 속지 마세요"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변호사에게는 의뢰인 비밀유지 의무가 있다) 재판장은 측은한 얼굴로 아주머니에게 새 국선변호인을 선임해줬다.

재판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려는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사리분별이 흐려 보이는 아주머니조차 재판정에서는 혼신의 힘을 기울인 점잖은 모습을 보이는데 다른 피고인들이라고 달랐겠는가. 법정에서 모습이 달랐는데 변호인 앞에서의 모습이 솔직한 모습이었다고 그 누가 장담하겠는가.

신민영 법무법인 예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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