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대선과 역술

박창억 2022. 1. 26.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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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술인 대선 예측 대부분 빗나가
김건희씨 무속 논란 끊이지 않아
'비선실세 국정농단' 악몽 떠올려
尹 후보 납득할 만한 조치 내놔야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가벼운 읽을거리로 ‘역술인의 대권 전망’이라는 기사를 준비하기 위해 연초에 유명 역술인, 무속인 몇 명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그들을 만나 “이번 대선에서 누가 당선될 것 같냐”고 물었다. 당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여론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던 시점이었으나 이들은 모두 이 전 시장의 낙선을 예상했다. 이름 석 자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한 유명 역술인은 대뜸 고건 전 총리를 꼽았다. 그러나 며칠 후 고 전 총리는 돌연 불출마를 선언했다. 다음날 그 역술인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예측을 수정해 달라고 간청했다.

2002년 대선을 3개월 앞둔 9월 하순 당시 언론에 소개됐던 역술·무속인 5명 중 아무도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예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역술인은 “노 후보는 제쳐놓아야 한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당시 노 후보는 지지율이 10% 초반대까지 곤두박질친 상황이었으나 막판에 극적인 반전을 일궈냈다. 처음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1997년에도 무속인 대부분은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예상했다.
박창억 논설위원
1995년 12월 당시 김대중(DJ)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는 전남 신안 하의도 부친 묘소와 경기도 포천의 모친 묘소를 경기도 용인으로 옮겼다. 대권 도전 4수에 나서는 DJ는 유명한 지관인 손석우씨에게 부탁해 용인에 묘터를 잡았다. 거주지도 33년 동안 살았던 서울 동교동을 떠나 일산으로 옮겼다. 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2년 뒤 DJ는 대권을 잡았다. 그 뒤 김종필, 이회창, 김덕룡, 이인제, 정동영 등 대권을 꿈꾸는 여러 정치인이 잇따라 조상 묘를 이장했다. 그러나 아무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풍수, 역술, 무속이라는 게 대부분 이같이 허망하고 부질없다.

저명한 공상과학소설(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미래에 대한 궁금증은 인간의 영혼에 각인된 본능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 궁금증은 불안을 낳고, 인간은 불안한 심리 상태가 지속하는 걸 피하기 위해 미래를 알고자 한다. 이런 인간 심리를 파고드는 게 역술이고 무속이다. 일반인들 삶에 역술·무속이 깊숙이 침투해 수조 원에 달하는 커다란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이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술이나 점성술을 가까이 한 권력자가 적지 않았지만, 한국에는 유난히 역술·무속에 의존하는 정치인이 많다. 역술인, 무속인 풍문 없이 치른 대선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오죽하면 2007년 17대 대선 때 뉴욕타임스가 “한국에서 샤머니즘이 부활하고 있다”고 보도했을까.

이번 대선에서도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부부를 둘러싼 무속 의혹이 끊이질 않고 있다. 대선 때마다 무속인 관련 소문이 나돌았지만, 이렇게 큰 논란이 빚어진 적은 없었다. ‘7시간 통화’ 녹취록에서 윤 후보의 부인 김건희씨는 윤 후보에게 ‘영적인 끼’가 있다고 했고, 무속인의 조언에 따라 청와대 영빈관을 옮기겠다고 했다. 김씨는 심지어 “홍준표·유승민도 굿을 했다”며 근거 없는 주장을 펼쳐 당사자들의 반발을 불렀다.

이에 앞서 ‘건진 법사’라는 무속인이 선대위 네트워크본부에서 활동하며 윤 후보 일정을 좌지우지한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국민의힘 후보 경선 TV토론에서 윤 후보는 왼쪽 손바닥에 ‘왕(王)’ 자를 적고 나와 논란이 됐고, ‘천공스승’이라는 사람이 윤 후보의 멘토라는 주장도 나왔다. 서대원이라는 유명 역술인에 따르면 윤 후보는 검찰총장 시절 김씨를 통해 “조국이 대통령이 되냐”고 묻기도 했다. 이 정도면 윤 후보 부부의 의식과 생활에 무속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고 봐야 한다.

21세기 첨단과학의 시대에 벌어지는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무속인의 선거·국정 개입은 문명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국정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다. 윤 후보는 주변 무속인들을 모두 정리하는 등 납득할 만한 조치를 내놔야 한다. 가뜩이나 추문과 가족 리스크 등으로 이재명, 윤석열 양강 후보에 대한 비호감도가 유난히 높은 대선이다. 국민 불쾌지수를 높이는 무속 얘기는 그만 나오도록 해야 한다.

박창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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