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명동은 가장 어두운 구간 지나는 중..'빛이 보인다'

이정국 입력 2022. 1. 27. 11:06 수정 2022. 1. 27.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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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커버스토리]꿈틀대는 명동
코로나19 직격탄 최악의 서울 명동 상권.."오히려 새로운 기회"
무권리금에 임대료 낮아진 틈 노려 새로운 핫플레이스 등장
품질·콘셉트만 좋으면 사람들 몰려.."이제는 내국인 겨냥해야"
지난 14일, 서울 중구 명동에서 시민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다.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초토화.’

지난 연말부터 수차례 방문한 서울 중구 명동 거리는 말 그대로 폭격을 맞은 듯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불야성이었다는 명동 거리엔 사람보다 비어 있는 건물을 찾기 쉬웠다. 임대하려면 몇년을 대기해야 했던 상가는 ‘폐업’, ‘임대’, ‘권리금 무(無)’라고 적힌 펼침막만 외롭게 붙어 있었다. 안쪽 이면도로는 더 심각했다. 문을 연 가게가 보이지 않을 정도. 각 기관에서 집계한 명동 상가 공실률은 50%에 육박하지만 이면도로 공실률은 70~80%에 이른다는 게 명동 상권 관계자들 말이다. 만난 상인들은 한숨부터 쉬고 고개부터 저었다. “죽지 못해 나왔다”는 한 노점상의 말이 귀에 꽂혔다.

“6·25 때도 불야성이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직격탄을 맞은 명동은 사실상 몰락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코로나 탓도 있지만 외국인 관광객에 전적으로 기대온 기형적 상권 구조가 기름을 부었다. 2000년대 들어 업태도, 서비스도 외국인 관광객에게 맞추다 보니 정작 한국인들은 명동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한해 1500만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에 다녀갈 정도로 한류 열풍이 대단했다. 하지만 전염병 창궐 뒤 지난해 외국인 관광객은 100만명을 넘기지 못했다. 김인수 명동관광특구협의회 사무국장은 “명동은 한국전쟁 때도 불이 꺼지지 않던 곳이었다.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다”라며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엔 상가 매출의 90%가 외국인 관광객에게서 나왔다. 바람직하지 않은 구조였다”고 말했다.

이대로 명동은 끝나는 걸까. 터널의 가장 어두운 구간을 지나는 명동이지만, 실낱 같은 희망의 빛은 보인다. 에스케이(SK)텔레콤이 지난해 12월 상권별 매출, 유동인구 등을 비교 분석해 발표한 ‘2021년 대한민국 100대 상권’을 보면 명동역 주변은 90위로 전년에 견줘 3계단 상승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최대 상권이었던 과거와 놓고 보면 초라한 성적표지만, 바닥을 친 신호일 수도 있다. 거리 곳곳에선 낙후한 건물을 헐고 새로 건축을 하는 광경도 종종 목격된다. 어차피 비어 있는 건물을 이 기회에 새로 짓겠다는 움직임이다. 명동에서 보기 힘들었던 작은 변화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외국인 관광객들에 의존했던 상가들이 거의 철수하고 내국인을 겨냥한 새로운 핫플레이스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는 것. 권리금도 없는데다 임대료도 고점 대비 40~50% 싸진 이때 한국 최대 상권을 노린 개척자들이 명동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몰또 에스프레소바에서 바라본 명동성당.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줄 서서 사진 찍는 카페

지난해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화제가 된 사진이 있다. 에스프레소 커피가 담긴 데미타세(에스프레소 전용 잔) 뒤로 보이는 이국적인 성당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지문이 닳도록 ‘좋아요’를 눌렀다. “유럽 같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이 사진은 지난해 9월 문을 연 ‘몰또 에스프레소바’에서 찍은 것들이다. 명동성당 바로 건너편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건물 3층에 있는 이 카페는 널찍한 테라스에서 명동성당 뷰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건물을 한 사업가가 장기임대한 뒤 리모델링을 해 새로운 상권을 조성했는데, 입주한 몰또 에스프레소바가 대박을 친 것. 사람이 얼마나 몰렸는지 기본 대기가 최소 1시간이었고, 사진 한장 찍기 위한 대기 줄이 건물 1층까지 내려왔을 정도였다. 주말엔 사실상 이용이 불가능해 평일에 휴가를 내고 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카페로 사람이 몰리자, 명동 상권을 조금이나마 살렸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짧은 겨울 휴가를 마치고 이달 10일 재개장한 몰또에 방문해보니 평일임에도 인산인해였다. 실내엔 자리가 없었고 영하 10도에 육박하는 추운 날씨에도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매장에서 만난 직장인 염수현(34)씨는 “지난해부터 너무 오고 싶은 곳이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포기했었다. 오늘은 연차를 내고 방문했다. 정말 뷰가 끝내준다”고 말했다. 한 손님은 “유럽 느낌 나오게 찍어줘”라고 친구에게 말하기도 했다. 여행이 고픈 이들의 ‘니즈’를 정확하게 간파한 것이다.

새롭게 무엇을 만든 것이 아닌, 기존에 있던 자원을 재활용해 성공한 사례라 몰또는 명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곳으로 평가받는다.

경복궁 근정전을 모티브로 한 명동숙희의 인테리어. 이정국 기자

명동으로, 명동으로

몰또처럼 새로 문을 연 곳도 있지만, 아예 본점을 명동으로 옮긴 가게도 있다. 을지로입구역 근처 카페 ‘맷차’다. 2018년 서울 연희동에서 문을 연 맷차는 개성 있는 다양한 티(tea)를 판매해 인기가 높은 곳이었다. 작은 규모로 운영하던 중,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자 조재용(38) 대표는 본격적으로 이들을 노리기 위해 지난해 6월 명동에 진출했다. 조 대표는 “연희동에 비해 임대료는 훨씬 높지만 명동은 그만큼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무척 힘들었는데 다행히 임대료 조정이 돼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버틴다’는 표현을 썼지만 맷차는 골목 상권을 살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사람이 붐비는 카페가 됐다. 특히 맷돌로 원두를 갈아서 내리는 맷돌커피와 비주얼이 화려한 말차 라떼가 에스엔에스(SNS)를 타면서 점심시간과 주말에는 줄을 서서 먹을 정도다. 직접 방문해보니, 평일임에도 4층 규모의 카페에는 빈자리가 드물었다. 맷돌커피를 마시면서 명동 거리를 내려다보는 재미는 덤. 화려한 색감의 말차 라떼 인증샷을 남기는 젊은 고객이 눈에 띄었다.

맷차의 외관. 맷차 제공
맷차의 말차라떼. 맷차 제공

맷차처럼 명동에 진출하는 핫플레이스는 속속 생겨나는 중이다. 특히 스피크이지 바(미국 금주법 시대 주점을 콘셉트로 한 바) 불모지였던 명동에 ‘숙희바’가 분점을 열면서 새로운 유행을 이끌고 있다. 숙희바는 전통주를 활용한 다양한 칵테일로 인근 을지로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인기 높은 바다. 코로나가 한창인 2020년 12월 명동성당 근처에 문을 연 ‘명동 숙희’는 이미 바 마니아들 사이에서 ‘낮술의 성지’로 소문이 났다. 직접 방문해보니, ‘명동에 이런 별천지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려하고 개성 있는 인테리어가 눈길을 끌었다. 경복궁 근정전을 모티브로 했다는 인테리어는 스마트폰을 꺼내지 않을 수 없도록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오후 3시 오픈 시간에 맞춰 갔는데도 이미 대기 손님이 있었다. “저녁 7시 정도면 자리가 꽉 찬다. 코로나 상황이라 이 정도지 외국인 관광객들이 오기 시작하면 자리 잡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칵테일을 만들던 바텐더가 말했다. 코로나 시국에 명동에 문을 연 이유를 물었더니 “권리금도 없고, 임대료도 낮아졌고 어떻게 보면 기회”라고 그는 답했다.

품질로 승부해야

코로나19 상황은 새로운 기회기도 하지만 여전히 명동의 최대 불확실성이다. 하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품질’은 코로나도 비켜 간다. 명동을 대표하는 명동교자나 하동관은 지금도 줄을 선다. 각 분야에서 최상의 맛을 내기 때문이다. 최근 명동에서 인기가 높은 일본식 라면집 ‘멘텐’은 2019년 1월 명동에 둥지를 틀었다. 문을 연 지 1년 만에 코로나가 터졌음에도 멘텐은 지난해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에서 가성비 맛집인 ‘빕구르망’에 선정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이곳도 전국에서 몰려든 라면 덕후들로 항상 긴 줄을 서야 한다. 직접 맛을 보니 ‘줄을 설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줬다. <미쉐린 가이드>도 이곳에 대해 “재료 하나하나의 익힘과 조리 상태가 상당히 정교하고, 특히 쇼유 라면 수프의 깊은 풍미와 감칠맛이 일품이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코로나 악재를 뚫고 간 무기는 역시 품질이었다.

멘텐의 소유라면. 이정국 기자
멘텐 앞에서 줄을 선 사람들. 이정국 기자

명동이 살아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악의 구간을 지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볼 수는 있다. 몇몇 가게들이 시동을 걸었다. 이제는 내국인을 겨냥한 확실한 콘셉트와 품질을 앞세워야 명동 상권을 본격적으로 살릴 수 있다. 맷차 조재용 대표는 “명동 상권이 본격적으로 살아나기 위해선 내국인, 특히 20·30대 젊은층을 겨냥한 업종이 많이 개발돼야 한다. 조금씩 그런 가게들이 생겨나고 있는 거 같다. 다행이다. 다른 상인들도 동참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인수 사무국장도 “코로나 이후라도, 외국인 관광객과 내국인 매출 비중이 최소 6 대 4는 되도록 업종 변경과 개발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선 최초의 백화점과 증권거래소가 들어선 곳. 명동백작 이봉구가 거닐며 한국 사회의 문화와 유행을 선도했던 곳. 명동은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밝을 명(明) 자를 쓰는 명동의 이름처럼 어둠의 터널 끝, 빛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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