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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굴은 지나가고, 술병은 덧없이 늘어나네

한겨레 입력 2022. 01. 27. 11:16 수정 2022. 01. 27.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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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박찬일의 안주가 뭐라고]박찬일의 안주가 뭐라고

큰 굴은 부침과 튀김으로
작은 굴은 젓갈·무침이 딱
미지근한 소주로 입 헹궈내
생굴. 게티이미지뱅크

굴이 굵어지고 있다. 통영이며 거제, 고흥까지 굴 작업장은 다 돌아다니며 일한 친구가 있다. 녀석의 말에 의하면 굴에도 서열이 있다는 것이다. 줄에 가리비 껍질을 매달아 얕은 바다에 두면 산란하여 바닷속을 정처 없이 떠돌던 굴 유생들이 둥둥 떠다니다가 이 패각을 보고는 하나씩 집을 차지한다. 애초에 굴 종패를 붙여 내리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양식이되, 출발부터 자연산이다. 실제로 굴은 먹이를 주지 않는다. 집을 차지하는 그놈들의 속사정까지는 알 리 없지만, 긴 줄에 이놈들이 붙어 깊은 바다에 내린다. 한 줄에 붙은 굴이 다 제 깜냥이 있어서 큰 놈, 작은 놈, 두툼한 놈, 얄팍한 놈 집 모양이 다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줄이 길긴 해도 굴이 빼곡하게 붙기 때문에 나중에 줄을 당겨보면 마치 몸싸움이라도 하듯 서로 엉기고 밀려서 굴 껍데기 모양이 다 제각각이란다. 껍질 모양대로 속살인 굴도 형체가 잡히는 것이다.

박신장(剝身場·알굴 따는 작업장, 벗길 박에 몸 신인데 몸이란 곧 살점인 알굴을 뜻한다)에서 깐 알굴은 바닷물에 헹구고 씻어서 판다. 세계에서 굴 까는 속도 1등이 한국이다. 현장에서 보면 2, 3초면 하나씩 알굴이 튀어나온다. 이른바 돈내기라고 하는 도급제라 빨리 깔수록 돈이 커진다. 그런 전쟁을 거쳐서 우리가 먹는 굴이 된다.

하여튼 그렇게 깐 굴이 크기가 다 달라서 크기별로 안주 해 먹는 요령도 늘었다. 우선 큰 놈들이 많은 통영·거제 굴은 주로 부쳐서 안주로 한다. 이쪽 굴은 살집이 커서 내장도 크다. 익히면 내장의 고소한 맛이 아주 폭발한다. 입에 넣어 뭉클하게 터지는 맛이 있다. 계란물을 입히는 방법을 쓰지만, 계란 두 개를 깨서 노른자는 두 개 쓰고 흰자는 한 개만 쓰면 더 고소하다.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다. 더러는 냉장고에 차게 식혀서 먹는 사람도 봤다. 그것도 일미다.

튀기는 것도 최고다. 밀가루나 튀김가루에 한번 굴리고, 계란물 입히고 빵가루 순으로 묻혀 기름 깊이 몸을 던진다. 속칭 서양식 표준 튀김인 ‘밀계빵’ 튀김이다. 튀김솥에 살짝 뚜껑을 덮어주는 게 좋다. 간혹 복수심에 불타는 굴이 펑펑 터져서 기름을 왈칵 튕겨낼 때가 있다. 한번 당해(?) 보면 ‘음, 굴튀김은 사 먹는 게 맞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굴튀김뿐 아니라 다른 튀김도 웬만해서는 사 먹자는 각성을 준다. 굴튀김을 이른바 타르타르소스에 묻히는 것도 좋지만, 식초에 담가 먹어도 좋다. 영국의 피시앤칩스 방식.

요새는 고흥 쪽 굴을 슬슬 구해서 다른 궁리를 해보았다. 어리굴젓이나 굴무침을 만드는 거다. 서산·태안의 서해안 굴도 인터넷에서 다 팔지만 값이 좀 세고 굴이 잘아서 손질이 좀 어렵다. 그 대안이 고흥 굴이다. 굴은 물에 오래 잠겨 있으면 먹이를 많이 먹고 살이 찐다. 통영·거제 굴이 그렇다. 고흥만 해도 조수간만이 있고, 썰물에 노출된다. 그런 굴은 크기가 아무래도 잘아지고 맛과 향이 응축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굴은 젓갈이나 무침으로 향을 살려주는 게 어떤가 싶었다.

먼저 어리굴젓 제조. 염도 10%에 버무려 따뜻한 곳에 사흘 두었다. 물이 많이 생기고 익는 냄새가 훅 올라온다. 이때쯤 냉장고로 옮겨 1주일 이상 발효시킨다. 고운 고춧가루와 마늘, 파를 넣어서 다시 숙성에 들어간다. 새콤한 맛이 돌고 향은 더 강해진다. 1주일쯤 있다가 개봉했다. 막걸리나 소주가 쩍쩍 붙는다. 누가 그랬다지, 굴은 짠맛을 가진 혀라고. 집에서 만든 어리굴젓을 몇점 입에 넣으니 제 혀처럼 노는데,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향이 깊다. 술로 헹군다. 겨울이라 거냉 소주다. 옛날 소주는 원래 다 거냉이었다. 술을 데운다는 건 청주뿐 아니라 소주도 그랬다. 거냉 정도가 아니라 데워 마시기도 했다는 거다. 1980년대 들어서 소주·맥주 도매상이 시장을 놓고 격전을 벌이면서 쇼케이스 냉장고를 무상대여한 게 아마도 찬 소주, 얼음 소주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 세대만 해도 그냥 가게 안 상온에 둔 소주를 마신 기억이 있다. 제주와 남도 일대에는 아직도 거냉 소주, 상온 소주가 남아 있다. 이게 또 버릇이 되면 일미다. 몇해 전만 해도 강한 옛날 맛 소주인 ‘빨간 뚜껑’은 25도였다가 23도, 어느새 21도가 되어버렸다. 복고풍인지 요새 다시 25도가 나온다. 희석식 소주가 나온 이래 가장 오랫동안 유지한 도수가 아마 25도일 것이다. 뭔가 딱 들어맞는 느낌의 도수다. 한 병씩 마시기에 주량도 맞고, ‘꺾어 마시기’에도 맞는 도수다. 16도짜리는 꺾어 마시면 싱겁다. 술이 목말랐던 사람에게는 단숨에 한 잔을 마시면 목젖부터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열감이 제대로 나오는 도수가 25도 아닌가. 어느 소주 회사인가 25도짜리를 최근에 출시하면서 ‘골드’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어리굴젓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굴무침을 하면 된다. 마치 어리굴젓의 속성 버전처럼 보이면서도 또 다른 맛의 세계다. 굴무침도 사나흘 냉장 숙성하면 맛있는 걸 보면 ‘젓갈’의 영혼을 가진 안주일 수도 있겠다. 고춧가루, 파, 마늘, 약간의 설탕과 액젓으로 충분하다. 한 이틀 냉장고에 두면 진득하게 물이 나오면서 윤기가 도는데, 이때부터 맛이 훨씬 좋아지고, 짜게 무친 게 아니면 가급적 빨리 먹어야 한다.

굴 철이 다 지나간다. 우리 인생에서 매해 한창때의 굴을 만나는 기회는 죽었다 깨어나도 두 자리 숫자다. 100살을 넘겨 살기는 힘들 테니까. 단풍이 그렇듯, 굴도 지나가고, 덧없이 술병만 남는다.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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