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 모호해 힘들었죠"..'발달장애인 선거공보물' 제작 분투기

박지영 2022. 3. 18.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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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대선]알기 쉬운 선거공보물 만든 사회적기업 '소소한소통'
정보약자 참정권 보장 위한 정보제공 절실
'쉬운 정보'는 어린이·노인에게도 도움
1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소소한소통 사무실에서 백정연 대표(앞줄 맨 오른쪽)와 직원들이 지금까지 소소한소통이 만든 책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각 후보의 10대 공약을 쉬운 문장으로 표현하다 보면 ‘그래서 이게 무슨 말이지’ 당황했던 적이 많았어요. 저희는 구체적인 방법 중심으로 문장을 쉽게 표현하려고 했는데, 대체로 공약이 선언적이다 보니…”

발달장애인들을 위해 ‘쉬운 정보’를 제공하는 사회적기업 ‘소소한소통’의 백정연(42) 대표는 지난 14일 <한겨레>와 만나 이번 대선에서 ‘쉬운 10대 공약’을 만드는 작업이 “지난 5년 동안 해온 작업 중 제일 힘들었다”고 말했다. 문장을 쉽게 바꾸려면 핵심만 남기고 부차적인 표현들은 빼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공약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백 대표는 ‘감염병 종식 후 2년 동안 피해 지원 및 극복을 위한 모니터링 지속’이라는 공약을 예로 들었다. 그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명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다”며 “각 후보자들의 인터뷰, 토론회 내용을 찾아 해당 문장을 ‘코로나19가 끝난 후 2년 동안 피해를 지원할게요. 잘 극복했는지, 필요한 도움을 받았는지 나라에서 살펴볼게요’라고 바꿨다”고 말했다.

소소한소통은 발달장애인 특성에 맞게 정보를 지원하고, 이들의 알 권리 보장과 사회 참여 확대를 위해 2017년 설립된 사회적 기업이다. 근로계약서, 배달의민족 앱 사용법, 코로나19 자가진단키트 사용법 등 일상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발달장애인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정보’로 바꾸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쉬운 정보’란 한번에 이해하기 쉬운 글과 글의 이해를 돕는 이미지로 구성된 정보를 뜻한다. 백 대표는 “기본적으로 한 문장에 하나의 이미지가 들어가도록 정보를 구성한다. 문장은 일상의 언어들을 선택해 말하듯이 글을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어려운 단어라고 다 바꾸는 것은 아니다. 고유명사처럼 지역 사회에서 많이 쓰는 표현이면 그대로 두고, 해당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는 주석을 달기도 한다.

백 대표는 “16쪽짜리 소책자 하나를 만드는 데 두 달 정도 걸린다. 어떻게 하면 핵심을 가장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 편집자와 디자이너 등 각 분야 직원들이 모두 모여 토론하고, 필요한 배경지식을 찾아서 넣는다. 가장 중요한 단계는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감수다. 당사자분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면 다시 전 단계로 돌아가 계속 수정하는 작업을 거친다”고 말했다.

발달장애인 등 정보약자를 위한 ‘쉬운 10대 공약’. 소소한소통 누리집 갈무리

‘쉬운 10대 공약’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수요에 부응하는 주택 250만호를 공급하겠다’는 문장은 ‘사람들이 원하는 곳에 집을 250만개 더 짓겠습니다’로 고치는 식이다. 그는 “수요·공급 같은 함축적이거나 뉴스·보고서에서 쓰는 어려운 말이 아니라, 대화 속에서 우리가 흔히 쓰는 일상의 언어들을 문장 안에 담아내려 했다”고 말했다.

발달장애인 특성에 맞는 정보제공이 민간에서 주도하다 보니 한계도 존재한다고 한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93조는 “정당의 명칭 또는 후보자의 성명을 나타내는 광고, 인사장, 벽보, 사진, 문서·도화, 인쇄물이나 녹음·녹화테이프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것을 배부·첩부·살포·상영 또는 게시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결국 ‘쉬운 10대 공약’은 인쇄물이 아닌 피디에프(PDF) 파일 형태로 소소한소통 누리집을 통해서만 제공됐다.

제작 시간과 여건의 한계로 이재명·윤석열·안철수(사퇴)·심상정 후보의 공약만 제공되기도 했다. 백 대표는 “4명 외에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발달장애인 분들이 ‘왜 다른 후보들은 없냐’고 많이 물어보셨다. 정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발달장애인 분들에게 쉬운 공보물을 제공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작업을 통해 ‘알기 쉬운 정보’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한다. 선거가 끝나자 발달장애인들은 소소한소통에 “쉬운 10대 공약 덕분에 원하는 투표자에게 투표할 수 있었다”고 전해왔다.

이해하기 쉬운 근로계약서(왼쪽), 코로나19 자가진단키트 사용법 안내서. 소소한소통 제공

이들의 작업은 발달장애인뿐만 아니라 어린이, 노인 등이 정보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백 대표는 “발달장애인뿐만 아니라 ‘쉬운 정보’를 찾는 분들은 노인, 어린아이, 한국에 사는 외국인 등 다양하다. 약국을 찾는 노인분들을 위해서 자가진단키트 사용법을 찾는 약사님도 계셨고, 저학년 아이들을 위해 초등학교에서도 (쉬운 정보를) 찾기도 했다”고 말했다.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이야기가 나오면 판단 능력을 의심하는 시선에 대해 백 대표는 말한다. “비장애인이라고 모두가 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사회가 발달장애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대는 것 같아요. ‘장애를 가졌으니 제대로 된 판단은 못 할 거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선입견이고, 편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발달장애인들에게 너무 어려운 정보들을 제공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백정연 소소한소통 대표가 1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소소한소통 사무실에서 지금까지 소소한 소통이 만든 책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박지영 기자 jy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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