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자산 엔화의 몰락?..'나쁜 엔저' 부메랑에 진퇴양난 일본

김연주 2022. 3. 22.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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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 있는 일본은행 본점 앞의 모습. [중앙포토]

미 달러·스위스 프랑과 함께 안전자산의 대명사이던 엔화의 몰락일까. "위기 때면 엔화 가치는 오른다"는 외환시장의 대표 공식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전쟁 발발과 원자재 가격 급등 등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지만, 엔화 값은 자유낙하 중이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엔화를 샀다가는 오히려 손해 볼 가능성이 커진다는 얘기다.

22일 오후 4시 기준 외환시장에서 엔화값은 달러당 120.4엔으로 떨어졌다(환율 상승). 2016년 2월 1일(달러당 120.98엔) 이후 6년 1개월 만에 가장 낮다. 특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달 24일 이후 엔화 가치는 4.7%가량 하락했다. 올해 들어 강세를 이어가는 달러와 보합세를 유지하는 중국 위안화의 움직임과는 사뭇 다르다.

안전자산 엔화값은 자유낙하 중.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과거의 엔화라면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실물 경제나 금융 시장의 위험이 커질 때 일본 엔화는 미국 달러와 함께 국제 자금이 폭풍을 피하는 주요 피난처였다. 전쟁과 금융위기 등이 생기면 엔화 값이 올랐던 이유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에 따르면 2008년 세계금융위기 당시 엔화 값은 4개월 만에 달러당 110엔대에서 80엔대로 뛰었다(환율 하락).

'엔화=안전자산'이란 등식을 무너뜨린 ‘엔저(低)’ 현상은 일본은행이 만든 판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이 ‘잃어버린 20년’에서 일본 경제를 구하려 펼친 경제정책 ‘아베노믹스’의 세 개의 화살 중 하나가 ‘엔저’다. 아베노믹스는 '금융 완화→엔화 약세(엔저)→수출 증가→기업이익 증가→주가 상승→투자 증가→임금 상승→소비 증가'란 선순환 시나리오를 기대했다.

이를 위해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는 2013년 3월 취임 직후부터 초저금리 등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펼치며 엔저를 유도했다.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오랜 초저금리는 오히려 독이 됐다. 미국 등과의 시장 금리 차가 확대되며 자금 유출도 이어졌다. 미국의 10년물 국채 금리는 2%대다. 반면 일본의 10년물 국채 금리는 0%대다. 해외에 투자하는 것이 낫다. 엔화 수요가 줄어드는 요인이다. 엔화 가치 하락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일본 10년물 국채 금리.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경상수지 적자 등 일본 경제 체력 약화도 엔화 가치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일본의 경상수지는 지난해 12월(-3708억엔)과 지난 1월(-1조1887억엔)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국제 원자재 가격 급등의 직격탄을 맞은 탓이다.

경상수지 적자가 나면 일본 기업은 대금 지급을 위해 엔화를 팔아 달러를 사야 한다. 엔화 가치는 더 떨어진다. 원자재와 수입 가격은 더 비싸진다. 경상수지 적자 폭이 더 커지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노지 마코토 SMBC닛코증권 수석 전략가는 "국제 유가가 배럴당 110~120달러 수준을 유지하면 엔화 가치가 달러당 125~130엔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

해외 진출 기업이 늘면서 벌어들인 외화를 엔화를 바꿀 필요도 줄었다. 엔 매수세가 감소한 것이다. 일본 경제에 대한 투자자의 회의적인 시각도 엔화 약세로 이어지고 있다. 윤덕룡 KDI 초빙연구위원은 "인구 고령화로 노동력이 가파르게 감소하는 데다, 이를 대체할 생산성 혁신이나 구조 개혁이 이뤄지지 못했다"며 "중장기적으로 통화가치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본 경제는 ‘나쁜 엔저’라는 부메랑을 맞고 있다. 그동안 엔저는 기업 경쟁력 강화 요인으로 꼽히며,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일본 기업의 주가가 오른다는 게 상식처럼 통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엔화 가치가 달러 대비 5% 가까이 하락했지만, 닛케이 지수 상승률은 2.93%에 그쳤다. 기업 부담이 커지고, 엔저의 고착화로 안전자산으로서 엔화의 위상도 흔들리게 됐다.

달러 오르고, 엔은 내리고.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엔저의 덫'에 갇힌 모양새지만 분위기가 쉽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이어진다. 구로다 총재는 지난 18일 금융정책결정회의 후에도 “현재의 금융정책(통화완화)을 수정할 필요성은 전혀 없다”며 “문제는 유가 상승이지 엔저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오히려 “엔저는 전체적으로 일본 경제에 플러스로 작용하고 있다”고 통화 완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58%로, 베네수엘라에 이어 세계 2위다. 금리를 올리면 정부의 이자 부담이 많이 늘어난다. 저금리 기조를 이어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엔화 하락 압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윤덕룡 연구위원은 "구로다 총재가 금리를 올리지 않는 건지, 올릴 수 없는 건지도 살펴봐야 할 지점"이라며 "일본은 국가부채가 너무 많은 탓에 금리를 올리면 그에 따른 부담이 크다"고 지적했다.

안전자산으로서 엔화의 쇠퇴는 한국 경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는 “수출 국가인 한국과 일본은 결국 기업의 경쟁력이 자국 통화 가치나 경제력에 중요한 요인”이라며 “일본 경제와 기업의 잠재성장률이 떨어진 원인이 고령화인 만큼 일본만큼 빠르게 인구 감소가 진행 중인 한국의 경우에도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연주ㆍ윤상언 기자 kim.yeon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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