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정부 5년 만에 풍비박산 난 재계...누가, 어떻게 복원하나? [송의달 LIVE]

송의달 에디터 입력 2022. 3. 26. 11:12 수정 2022. 12. 23. 11:1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경제계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반세기 넘게 지속돼 온 ‘재계(財界)의 붕괴’이다. 1961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前身)인 ‘한국경제인협회’ 창립 후 우리나라에선 대기업 오너가 회장을, 전문 경영인이 상근부회장을 맡아 ‘재계’라는 모임과 창구가 기능해 왔다. ‘재계’에는 한국 경제의 축(軸)을 맡아 나라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자부심과 기개(氣槪)가 상당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21년 12월 27일 청와대에서 열린 '청년희망 온(ON) 참여기업 대표 초청 오찬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최정우 포스코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문 대통령,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현모 KT 대표이사,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뉴시스

◇구심점도, 공동 목표도 ‘소멸’

하지만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대기업 때리기’와 연이은 ‘대기업 총수들 구속’ 광풍(狂風)은 한국 재계의 구심점을 정조준하며 풍비박산 냈다. 여기에다 문 정부는 이병철·정주영 회장 등이 주도해 만든 전경련을 5년 내내 유령단체 취급했다. 그 결과 ‘재계 실종(失踪)’ 사태는 심화했고 파장은 광범위했다.

2022년 3월 말, 한국 경제계에는 중심 인물이나 공동의 목표가 없다. 뿔뿔이 흩어져 기업의 생존과 이익, 오너 대주주 일가(一家)의 안전을 알아서 도모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모습 딱 그대로이다. 이런 현 주소를 재확인시키는 ‘일’이 이번 주초 추가됐다.

우리나라 재계의 본산으로 꼽혀온 서울 여의도에 있는 전경련(FKI) 빌딩 정문 모습/전기병 기자

◇‘힘있는 전직 관료’ 통해...‘각자도생’

경제단체 6곳 중 유일하게 민간인 출신 상근부회장을 둬 온 한국중견기업연합회(약칭 중견련)가 관료 출신으로 ‘물갈이’한 것이다. 이달 21일부터 서울 마포구 대흥동 중견련 상근부회장실로는 박일준 전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정책실장이 출근하고 있다. 그는 2018년 초부터 작년 4월까지 한국동서발전 사장도 지냈다.

그의 중견련 입성은 정부의 압력이나 요청 때문이 아니었다. 경제단체의 한 고위 임원은 “최진식 신임 중견련 회장이 사재(私財)를 들여 전임 부회장이 받던 연봉의 두 배를 약속하고 부회장으로 영입했다”고 말했다. 중견련 회장이 여러 목적에서 ‘힘있는 전직 관료’ 구인(求人)에 스스로 나섰다는 얘기이다.

중견련의 ‘정부 인사’ 낙점으로 우리나라 6개 경제단체는 퇴직 공무원들이 상근부회장을 모두 꿰차게 됐다. 군사 정권시대에도 경험 못한 ‘정부의 직할(直轄) 관리’ 시대가 기업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열린 것이다. “이런 모습이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하는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에 걸맞나?”라는 문제제기 마저 희미하다. 정치권과 정부가 경제를 압도하는 ‘정치 만능’ 시대에 질문 조차 사치(奢侈)로 여겨지는 탓이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왼쪽 네번째)이 2020년 12월 22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경제단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입법 중단 입장 발표' 기자회견 자리에 반원익 중견련 상근부회장(맨 왼쪽)을 비롯한 경제단체 상근부회장들이 다수 참석했다./조선일보DB

◇6개 경제단체 부회장, 전직 관료들이 獨食

경제단체 상근 부회장은 기업으로 치면 최고운영책임자(COO)와 같다. 조직의 활동 방향과 정책 결정, 인사(人事)·대외 관계 등을 총괄하며 두둑한 연봉도 받는다. 행정부 고위 관료 출신들은 능력, 정부와의 소통력, 도덕성 등에서 뛰어난 측면이 있다. 이들의 경제단체 부회장 독식(獨食)을 무작정 흠잡을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냉정하게 보면, 이 현상 하나에 처참하게 일그러진 한국 경제계의 자화상(自畵像) 두 개가 응축돼 있다. 하나는 기업인들이 자유 의지와 판단 그리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으로 업계 공동의 이익과 한국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 뭉치고 협력하는 기풍(氣風)이 사라졌음을 보여준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경제학)는 “문재인 정부 5년간 검찰 수사 같은 혹독한 외풍(外風)에 시달린 탓이 크지만, 현재 우리나라 오너 기업인들은 어느 때보다 외부와의 연줄과 로비로 청탁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후진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다.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미국상공회의소(U.S. Chamber of Commerce) 본부 건물. 1912년 창립돼 300만이 넘는 기업·단체 회원을 두고 있다. 백악관, 의회 출신의 로비 전문가를 간부로 가끔 채용하지만 행정부 장·차관, 1급 관료 출신을 상근부회장으로 영입하지 않는다./Wikimedia Commons

◇정부 ‘직할 관리’...정부 부처의 ‘2중대化’

다른 하나는 민간 이익 단체인 경제단체들 마저 관료 논리와 시각을 추종하는 준(準)공무원 조직으로 변질돼 간다는 점이다. 경제 단체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전직 4대 그룹 사장은 “공무원 출신 상근부회장들은 오랜 관료 생활을 바탕으로 회장 연설문과 말씀자료까지 ‘정부 입맛’에 맞춰 공무원식(式)으로 만들어 정부 부처의 ‘2중대’화(化)를 자초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은 디지털 혁명과 혁신 기업 등장으로 민간의 자유·창의·자율이 중시되는 21세기 시대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관(官)주도 경제개발을 하던 1960~70년대도 아닌데, 퇴직 관료들의 경제단체 싹쓸이는 민간 경제단체 마저 준(準)정부기관으로 추락한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한국 경제가 부지불식간에 ‘정부가 이끄는 대로의 자본주의’, 즉 사실상 사회주의로 치닫고 있다는 경고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022년 3월 21일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경제 6단체장들과 오찬 회동하고 있다./국회사진기자단

◇尹 당선인, ‘민간 중심 경제’ 이뤄낼까?

그런 점에서 ‘민간 중심 경제로 전환’을 공약으로 내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 대해선 ‘기대 반(半) 우려 반’이라는 게 뜻있는 기업인들의 진솔한 평가이다. ‘약속’을 ‘현실’로 만드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아서다. 무엇보다 큰 관건은 5년 내내 정치의 일방적인 독주(獨走)로 피폐해지고, 자포자기 상태가 된 민간 기업인들의 의욕과 활력을 어떻게 되살리느냐이다.

가장 중요한 열쇠는 한달 쯤 후 출범하는 새 정부와 정치권이 쥐고 있다. 이들이 민간에 대한 개입·규제 및 간섭을 줄이고, 기업인을 다독거리며, 국부 창출의 주인공으로 신바람나게 뛰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 위축된 기업가 정신을 살려 기업의 해외 탈출행(行)을 줄이고, 국내에서 다시 기업 활동을 해보자는 “으쌰으쌰” 분위기가 없다면, 윤석열 정부의 경제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 기업 상대 적폐청산 수사를 주도한 윤 당선자에 대해 기업인들이 경계감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현직 관료들은 경제단체 같은 민간 분야로 낙하산을 최소화하고 민간의 자강(自强)을 우선해야 한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1899~1992년)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노벨경제학상(1974년) 수상자이다. <노예에의 길(The Road to Serfdom)>(1944), <자유의 구조>(1960) 등 저서를 냈다./조선일보DB

◇“‘계획 경제’는 자유 짓누르는 노예의 길”

기업인들 역시 경제단체를 정치권과의 ‘소통 창구’ 또는 ‘외압(外壓) 막음’ 용도로만 이용하려는 생각을 떨치고 ‘재계’ 복원에 적극 나서야 한다. 전경련은 1990년대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조규하-황정현-손병두-이윤호-현명관-정병철-이승철 같은 민간인이 상근부회장을 맡아 재계의 ‘맏형’ 역할을 한 전력(前歷)이 있다.

2020년 1월 2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경제인 신년회에 참석한 국내 4대그룹 총수. 왼쪽부터 구광모 LG회장, 최태원 SK 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뉴시스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정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자유를 짓누르는 노예(奴隸)의 길”이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노예 상태를 거부하는 ‘자유 경제’의 길은 공짜로 주어지는, 장밋꽃 만발한 땅이 아니다.

한국 대기업을 이끌고 있는 창업자 오너 2~4세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구광모 LG 회장,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 조현준 효성 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사장/조선일보DB

◇‘경제적 이념 정체성’도 분기점에 선 대한민국

이런 각도에서 이재용·최태원·정의선·구광모·신동빈 등 2~3세 대기업 오너 총수들의 행보가 주목된다. 이들이 선공후사(先公後私) 정신과 용기, 지혜로써 한국 재계 재건에 발벗고 나설 건가? 아니면 뒷짐진 채 가만 앉아 있을 건가? 이들이 어떤 방향타를 잡을지는 자신의 신념과 기업, 가문의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대한민국은 경제적 이념(理念) 정체성(正體性) 측면에서도 중대 분기점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작금의 선택은 한국 경제가 힘들지만 자유시장 경제의 길로 복귀할 것인지, 아니면 정부 주도 자본주의로 더 깊숙히 빨려 들어갈 것인지의 운명(運命)을 결판지을 것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