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 업은 세살 동생이 나 대신 총에 맞았다”…12살 소녀의 4·3

허호준 기자 2022. 4. 3.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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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오빠 ‘도피자’ 된 뒤 부모님·둘째오빠 경찰이 쏴죽여
남은식구 한겨울 한라산 도피뒤 토벌대에 떼죽음
식구 13명 중 11명 희생…“4·3위령제 꼭 참석” 당부
제주4·3 때 13명의 식구 가운데 11명을 잃은 김평순씨가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 옛 향사 앞에서 아버지가 희생될 때 있었던 팽나무를 가리키며 당시를 떠올리고 있다.

“죽었는데 어떻게 말소리가 들리지?”

세살배기 막내 여동생을 업은 채 눈에 파묻힌 12살 소녀 김평순(86·서귀포시 안덕면)은 이렇게 생각했다. 토벌대가 한라산 볼레오름(해발 1375m) 부근 굴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피난민들을 향해 나오라고 소리치며 총을 쐈다. 굴 안에서 죽은 사람도 있었고, 끌려가는 이들도 있었다.

1949년 1월27일 오전. 한라산에는 눈이 내리고, 또 내렸다. 그해 겨울 제주의 산간에는 어른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다. 토벌대의 총소리가 사방에서 들렸고, 아기 우는 소리와 신음이 흘러 나왔다.

자신도 죽은 줄 알았던 평순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눈은 곳곳이 붉은 동백처럼 벌겋게 물들어 있었고, 죽어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함께 피난생활을 하던 큰오빠와 두살배기 여자 조카를 업은 올케, 네살짜리 남자 조카가 먼저 굴에서 나오고 16살 언니와 8살 동생은 평순과 뒤에 나왔다. 토벌대는 언니가 크다며 피난민 두명과 포승줄로 묶었다.

평순은 등에 업은 동생을 담요로 덮어씌우고 있었다. 굴 밖으로 나오자 큰오빠네 가족은 모두 죽어 있었다. 토벌 대상에는 남녀도, 노소도 없었다. 눈 위에 엎어졌던 평순은 힘겹게 일어났다. 머리와 얼굴, 어깨 위로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아, 내 얼굴, 머리카락이 왜 피범벅이 됐지?” 순간 동생을 업고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동생을 묶고 있던 걸렝이(띠)를 풀고 보니 이미 죽어 있었다. 뜨거운 물에 손을 덴 것 같은 아픔. 눈 속에 몸을 파묻고 다시 나오고 싶지 않을 만큼 충격이 밀려왔다.

“내가 눈 위에 엎어지니까 동생도 같이 엎어지잖아. 동생 때문에 내가 눈 속에 납작하게 파묻힌 거지. 그 위로 토벌대가 쏜 총에 동생 머리가 맞은 거야. 동생이 아니었으면 내가 죽었지. 동생이 나를 살렸어.”

73년 전 그날의 상황을 설명하는 평순의 목소리가 떨렸다. 평순은 “동생이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며 말끝을 흐렸다. 포승줄에 묶였던 16살 언니와 8살 동생도 옆에 죽어 있었다.

피로 엉겨붙은 머리카락을 피 묻은 손으로 떼어낸 평순은 업혀 있던 동생을 언니 옆으로 옮겨놓고 일어났다. 그 위로 눈이 내렸다. 그날 하루에만 평순의 가족 8명이 겨울 한라산 눈 속에 묻혔다. 둘째언니도 피신 도중 산에서 숨졌다. 그나마 아홉살 남동생은 굴 밖으로 나와 흩어지면서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제주4·3 당시 경험을 이야기하는 김평순씨.

1948년 11월23일. 평순의 가족에게 쉬지 않고 밀려드는 세찬 바닷바람 같은 고난이 시작된 날이다. 마을에 나타난 경찰들은 큰오빠가 사라져 ‘도피자 가족’이 된 평순네와 주민들을 마을 향사(창천리 복지회관) 마당으로 불러냈다. 병환 중이던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나갔다. 모자에 붉은 띠를 두른 경찰이 아버지한테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아들 어디로 보냈나?”

“이렇게 아픈데 아들이 어디 갔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같이 사는 가족도 모릅니다.”

총소리가 났고,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친구들과 함께 갔던 평순은 이 장면을 목격하고, “총에 맞으면 사람이 죽는 건가?”란 생각을 했다. 경찰은 총에 착검된 칼로 숨진 아버지 몸을 두차례 찔렀다.

경찰은 이어 집으로 찾아와 불을 붙였다. 돌아가던 길에 경찰은 주민 2명을 더 쐈다. 경찰의 눈길이 가는 곳엔 죽음이 있었다. 어머니는 불을 끄다 말고 오빠, 언니와 달려가 아버지의 주검을 수습했다. 평순은 “어머니가 울고불고한 걸, 말로는 다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경찰은 조그마한 초가에 ‘도피자 가족’을 모아놓았다. 겨울로 접어들 무렵, 또다시 경찰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어머니와 둘째오빠, 둘째언니와 집주인 할아버지, 또 다른 할머니 등 5명을 잡아갔다. 경찰은 이들을 지서로 데려가다 길가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먼저 쐈다. 이어 평순 가족 차례가 왔다. 어머니가 경찰에 매달렸다.

“아무 죄도 없는 아이를 왜 죽이려 합니까? 아들 난 죄로 나는 죽지만 딸은 무슨 죄가 있어서 죽이려고 합니까? 밥도 못해먹는 아이들이 집에 줄줄이 있어요. 살려주세요.”

심장을 찢어내는 것 같은 어머니의 울부짖음에 경찰은 언니만 살려두고 어머니와 오빠를 쐈다. 지서에 끌려갔던 둘째언니는 이튿날 돌아와 평순, 올케와 함께 마차를 끌고 가 어머니와 오빠의 주검을 수습해 아버지 옆에 묻었다.

동네 아이들은 ‘폭도 새끼’라고 놀리며 상대하지 않았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원수는 없어. 밖에 다니지도 못했어.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여.”

제주4·3 때 13명의 식구 가운데 11명을 잃은 김평순씨가 2012년 자신의 삶을 공책에 적었다.

1948년 음력 동짓달 그믐날(12월29일). 높은 하늘에 뜬 별이 유난히 총총했던 그날 밤, 평순네 식구들은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수용됐던 허름한 집에 찾아온 사람들을 따라나섰다. 그 사람들은 “여기 있으면 죽는다. 산으로 피신하자”며 잠자는 평순 가족을 깨워 길을 재촉했다. “열두살짜리가 세살 난 막냇동생을 업고 한밤중에 겨울 산길을 걷는 걸 생각해 봐.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어.”

산으로 피신한 뒤 한달이 채 안돼 온 가족이 절멸하고, 평순은 조그마한 태역밭(풀밭)에서 눈물범벅, 피범벅이 된 채 허둥거렸다.

“여기가 어디야? 어디로 가야 하지?”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혼자 내동댕이쳐진 상황이었다. 온 식구가 죽었지만, 슬퍼할 틈마저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동쪽에서 총소리가 나면 서쪽으로 뛰고, 서쪽에서 총소리가 나면 동쪽으로 뛰면서 그 자리에서 뱅뱅 돌았어. 혼자서 말이야.”

그러다 한동안 가만히 서 있자 숲속에서 손짓하며 부르는 소리가 났다. 도피 생활을 하던 ‘그 사람’은 “혼자 돌아다니다가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고 했다. 그 사람과 밤길을 걷다가 갑자기 총소리가 울렸다. 냇가 바위까지 뛰었는데, 그 사람은 사라지고 또다시 혼자가 됐다.

제주4·3 당시 경험을 이야기하는 김평순씨.

12살 소녀의 피난 길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평순은 날이 밝자 다시 산으로 올라가다 주민들을 만났다. 어디서 어떻게 덮칠지 모르는 죽음의 그림자를 피하려 피난민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어떻게 혼자서 이런 곳을 다니니? 따라다니다가 숨으라고 하면 숨어.” 평순은 나중에 서귀포수용소에서 이들을 다시 만났다.

“토벌대들이 자꾸 올라오니까 우리도 자꾸 옮겨 다녔어. 나무 틈에도 가서 살고, 굴속에서도 살고, 수풀 속에서도 살고 했어.”

1949년 2월 어느 날, 토벌대에 잡혔다. 평순은 “(귀순을 권고하는) 삐라(유인물)를 뿌려도 글자를 몰라서 보지도 못하고 그냥 다니다가 토벌대가 들이닥쳐 잡혔다”고 말했다. 정방폭포 부근 단추공장에 마련된 서귀포수용소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찾아와 ‘수양딸’로 가자 제안했지만 ‘싫다’고 했다. “우리 집 열세식구가 다 죽고 나 혼자 살아남았어요. 모두 나 앞에서 죽었는데 내가 가버리면 누가 제사를 지내줍니까.”

수용소에서 돌아온 평순은 집터가 있는 올레(골목)길 옆 움막(마차집)에서, 그동안 죽은 줄만 알았던 남동생을 만났다. 평순은 그곳 움막에서 지내며 숨진 가족들을 위해 제사를 올렸다. ‘폭도집’이라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서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살암시민 살아진다’(살고 있으면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어. 그러니 나도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않고 내 할 일이나 하고 다녔어. 문도 없는 마차집에서 울면서 살았지.”

평순의 집은 종손 집이었다. 메(제사 때 올리는 밥)를 23개까지 올릴 때도 있었다. 13살부터 20살이 되도록 집안일을 돌봐야 했다. 동생을 공부시키는 것도 온전히 평순의 몫이었다. 14살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한 평순은 21살에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에도 먹고 살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남들 앞에서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고 했다.

제주4·3 때 불타 없어진 집터에 선 김평순씨.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74년 전의 향사 마당의 팽나무는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다. 옛 향사 마당을 쓸어낸 바람이 팽나무 가지들을 건드린다. 지금은 흙 속에 잠들어버린 가족들 기억도 함께

“살면서 남을 원망한 적이 손톱만큼도 없어. 세상을 잘못 만나서, 세상이 그런 세상이니까 그렇게 됐구나, 하고 생각해버리지. 자식들에게도 말해. 남한테 싫은 말 하지 말고 남이 떡 하나 먹으면 두개 줘라. 그런 마음 갖고 살아야 한다.”

삶 자체가 시간의 고문에서 달아나기 위한 필사적인 싸움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기억들, 불덩이 같은 한없는 슬픔이 짓눌렀다. 기억의 창문에서는 겨울 한라산을 하얗게 덮었던 눈이 보이고, 총소리가 들리고, 올레 안쪽에 자리 잡은 초가, 아버지와 어머니, 등에 업혔던 세살 동생과 언니, 오빠들의 얼굴이 보인다. 숨비소리를 내며 세월에 자맥질하는 해녀처럼 평순의 마음 속에 가족들 얼굴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운명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평순은 2012년 자식들에게 보여주려고 자신이 살아온 삶을 공책에 이렇게 썼다.

“김승택(아버지) 50세. 고신출(어머니) 45세. 김병민(큰오빠) 24세. 자녀 2명. 강원중(올케) 23세. 김병용(둘째오빠) 22세. 김팔석(둘째언니) 18세. 김평선(셋째언니) 16세. 김평화(여동생) 8세. 김평수(막내 여동생) 3세. 큰외삼촌(평순의 큰오빠), 외숙모 시체를 못 찾아서 어머니는 너무나 억울하고 한이 맺힌다. 1948년 4·3에 다 돌아갔다. 그때 외가 식구가 11명이나 다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이모들도 모두 다 4·3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작은외삼촌 두 남매만 살아남았다. 그때 어머니는 12살, 외삼촌은 9살. 두 남매는 고아가 됐다.

한 집에 열세식구가 살다가 우리 두 남매만 살아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엄마와 외삼촌이 아무리 울어도 누가 말하여 주는 사람도 없었다.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있어서, 동생이 죽었기 때문에 살았다. 어머니는 눈을 감으면 그때 생각이 눈에만 보인다. 모든 친정 식구가 어머니 앞에서 죽어서, 죗값을 치르라고 살았지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그때부터 남한테 제대로 말하여 본 적도 없다. 어떤 고초를 겪고 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머니가 4·3위령제에 못가도 너희들은 1년에 한 번은 꼭 4·3 위령제에 가봐야 한다.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꼭 참석해야 한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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