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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 대학살'에도 미적지근.. 정부, 러시아 비판조차 안 했다

박현주 입력 2022. 04. 06.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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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부차 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대학살 사건에 대해 세계 각국이 고강도로 규탄하며 러시아에 대한 강경 대응에 나서기로 한 가운데 한국은 공식 입장에서 러시아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상황 자체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는 데 그쳤다.
지난 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 도시 부차에서 경찰과 시 당국 직원이 불탄 시신을 옮기는 모습. Genya SAVILOV / AFP. 연합뉴스.


소극성 드러난 세 줄짜리 성명


부차 대학살이 알려진 건 지난 2일(현지시간), 한국 시간으로는 3일 무렵이다. 러시아군이 휩쓸고 간 도시 곳곳에 참혹한 모습의 민간인 시신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다.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이로부터 며칠이나 지난 5일에야 나왔다. 세 줄짜리 짤막한 입장이었다.

외교부는 대변인 성명을 내고 "우리 정부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발표한 민간인 학살 정황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며 "전시 민간인 학살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아울러 독립적인 조사를 통한 효과적인 책임 규명이 중요하다는 유엔 사무총장의 4ㆍ3 성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3일(현지시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성명을 통해 "부차에서 살해된 민간인의 모습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며 "효과적인 책임 규명을 위해 독립적인 조사가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이날 외교부 대변인 성명에서 정부는 학살 가해자이자 국제법 위반 주체로 러시아를 지목하지도, 참상에 대한 러시아의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당연히 이뤄져야 할 진상 조사에 대해서도 기존에 유엔이 밝힌 입장에 편승하는 식으로 필요성을 지지하는 데 그쳤다.
5일(현지시간) 발표된 우크라이나 민간인 학살 관련 외교부 대변인 성명. 외교부.


세계 각국 "러시아가 전범" 한 목소리


반면 미국과 유럽 국가의 대응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극적이다.

미국은 부차의 참상이 드러난 직후 추가 대러 제재 검토와 러시아의 유엔 인권이사회 퇴출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4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취재진과 만나 푸틴을 "전범"으로 재차 칭하며 "그는 잔인하고 부차에서 일어난 일은 너무 충격적"이라고 비판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매우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3일, CNN 인터뷰)며 "고의적 살인, 고문, 성폭행, 잔혹 행위"(5일, 취재진 앞)라고 맹비난했다.

유럽연합(EU)과 영국도 한 목소리로 부차 대학살을 "러시아의 전쟁 범죄"로 규정하고 추가 제재를 검토 중이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지난 3일(현지시간)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러시아의 비열한(despicable) 공격"이라고 규탄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같은 날 "참을 수 없다"며 "러시아가 답하라"고 했다. 이외에도 "고의적 전쟁 범죄"(덴마크), "러시아가 저지른 전쟁범죄"(스웨덴), "부차 참상에 분노"(스페인) 등 규탄 메시지가 잇따랐다.

유럽 국가들은 자국 주재 러시아 외교관 추방 조치에 들어갔다. 로이터 등에 따르면 5일(현지시간) 기준으로 유럽 각국에서 쫓겨나게 된 러시아 외교관은 200여명에 이른다. 정상적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에 대해 매우 이례적이고 강경한 조치다.

5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이 철수한 우크라이나 부차 지역에서 50대 여성이 울고 있는 모습. 이 여성은 자신의 아들이 러시아군에 의해 총살됐다고 했다. REUTERS/Zohra Bensemra. 연합뉴스.

분노는 아시아ㆍ태평양에서도 터져나왔다. 마리스 페인 호주 외교장관은 3일(현지시간) 트윗에서 "러시아군의 처형, 성폭행, 약탈에 충격을 받았다"며 "비열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호주는 이튿날 러시아에 대한 사치품 수출 금지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4일(현지시간) 트윗에서 "절대로 참을 수 없다"며 "가장 강하게 규탄한다"고 밝혔다. 같은 날 기자회견에선 "국제사회에서 (러시아를 향한) 비난 목소리가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부차 대학살 관련 지난 4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의 트윗. 트위터 캡처.
부차 대학살 관련 지난 3일(현지시간) 마리스 페인 호주 외교장관의 트윗. 트위터 캡처.


文, 끝까지 인권에 '선택적 접근'


이와 달리 한국이 우크라이나 사태 초반 대러 제재에 늑장 동참한 데 이어 명백한 인권 참상에까지 미온적 입장을 보이는 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나 국제사회의 기대에 어긋난다는 아쉬움이 나온다.

현재 국제사회 주요국 중 러시아에 대한 비판을 삼가는 나라는 중국 정도에 불과하다. 장쥔(張軍) 주유엔 중국대사는 5일(현지시간) 부차 대학살 관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사실에 근거한 비판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간인 희생 영상이 끔찍하다"면서도 "사건 원인 검증이 우선"이라고 말하며 러시아를 두둔한 것이다.

러시아 비판을 머뭇거리는 한국의 대응이 신중한 태도가 아닌 자칫 러시아 감싸기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특히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오는 7일 한국 외교부 장관으론 처음으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ㆍNATO) 외교장관 회의에 초청 받아 참석한다. 이번 회의에선 부차 대학살과 관련한 우크라이나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될 가능성이 크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지난 5일(현지시간) 부차 대학살에 대해 "유럽이 수십년 동안 본 적 없는 참을 수 없는 만행"이라고 규탄했다. 정 장관만 다소 동떨어진 입장을 갖고 브뤼셀로 향한 모양새가 된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침묵이 아쉽다는 목소리도 있다. 주요국 정상 다수가 정부 공식 입장과 별개로 트위터, 언론 인터뷰, 기자회견 등을 통해 부차 대학살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문 대통령은 인권 변호사 출신이면서도 4년 연속으로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공동제안국에 불참하며, 북한 인권 문제에는 눈감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부차 학살에 대해서도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으며 문 대통령이 임기 말까지 인권에 선택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질 수 있다.

부차 대학살과 관련해 5일(현지시간)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화상으로 연설하는 모습. Spencer Platt/Getty Images/AFP. 연합뉴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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