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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점 안 보이는 한일관계, 이대로 5년 더?

김찬호 기자 입력 2022. 04. 09.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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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부터) / 연합뉴스


한일관계 개선을 지향하는 윤석열 정부가 출범도 전에 암초를 만났다. 일본은 지난 3월 29일 역사왜곡 표현 등이 담긴 교과서 293종에 대한 검정 심사를 마쳤다. 이에 따라 2023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 이상이 사용할 역사 교과서에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일본군’, ‘강제연행’ 등의 표현이 사라진다. 또 사회 교과서 12종에는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명칭)는 일본 고유 영토”라는 주장이 포함됐다. 이중 8종은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표현했고, 3종은 “한국의 점거” 또는 “한국이 일방적으로 자국 영토라고 주장한다”라고 서술했다.

사실 일본 교과서 검정 파동은 매해 3월이면 불거지는 연례행사다. 이번 사태를 두고 “일본이 윤석열 정부와의 관계를 겨냥했다기보다 정해진 계획을 따른 것”이라는 전문가 분석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파동에 대한 윤 당선인의 행보를 놓고는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교과서 문제가 불거지기 하루 전 아이보시 고이치 주한일본대사를 접견하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문제가 불거진 직후에는 “아직 당선인 입장이라 개별적인 외교사안에 대한 입장 표명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매해 3월이면 발생하는 한일 갈등을 몰랐다면 정보력의 문제이고, 알고 있었다면 역사인식에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과거 일본 정부가 역사 문제에 여러차례 사죄 의사를 밝힌 건 사실이다. 동시에 현재 일본 정부가 역사 문제를 왜곡하려 는 것 역시 사실이다. 윤석열 정부는 이 두가지 사실이 만드는 모순 속에서 한일관계 개선을 말한다. 상황은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당장 강제동원 배상 판결로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 강제매각 절차가 진행 중이다. “윤석열 정부의 한일관계는 역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어떻게 공존할지 해답을 찾는 과정이 될 것”이라는 박정진 일본 쓰다주쿠대 교수의 지적은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한다. 한일관계 개선을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판단의 근거가 필요한 시점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3월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접견실에서 아이보시 고이치 주한 일본대사와 악수를 하고 있다. / 인수위사진기자단


■왜 한일관계를 개선해야 하나

한일관계 개선은 반드시 국익에 근거해 이뤄져야 한다. 단순히 ‘문재인 정부가 한일관계를 악화시켰기 때문’은 명분이 될 수 없다. 이에 따라 관계개선의 첫 번째 근거는 안보문제가 꼽힌다. 미국 바이든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중국, 북한 등을 역내 위협 요소로 본다. 대안은 동맹국과의 연대인데 오랜 기간 동북아시아의 안보는 한·미·일 삼각안보체제가 중심이 됐다. 한국과 일본은 동맹관계가 아니지만 각각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연결된 구조다. 손열 동아시아연구원 원장은 “한일관계가 막혀 있는 상태는 한국 외교 전반에 부담으로 작동한다”며 “당장 안보적 측면에서 한·미·일 협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북한 문제를 다루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 입장에서도 한·미·일 협력체제가 약해지면 대중견제에 필요한 레버리지 확보가 어려워지는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미국 민주당 정부는 한일관계 악화를 바라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의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2017년 합의 과정을 검토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테스크포스(TF)’는 최종보고서에서 “한일관계 악화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략에 부담으로 작용함으로 미국이 양국 사이의 역사 문제에 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외교환경 아래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 협상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조속히 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추진한 건 오바마 대통령의 민주당 정부다. 이는 바이든 정부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손 원장은 “지난 2월, 미국이 발표한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에 ‘한일관계 개선이 처음으로 명시됐다”며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패권적 리더십을 회복하기 위한 10가지 행동강령 중 하나로 한일관계 개선을 명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안보와 빠르게 연결되고 있는 경제 문제 역시 관계개선의 주요 동력이다. 윤 당선인은 경제와 안보가 하나가 되는 ‘경제안보 시대’를 여러차례 강조했다. 미국은 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운영하는 국가끼리의 공급망 재편을 서두르고 있다. 일본은 한국과 같은 경제질서를 운용하는 국가라는 점에서 관계개선이 필요할 수 있다. 또 수출주도형 경제를 운영하는 한국은 역내 경제협력 참여를 위해 주변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이 대표적이다. 일본은 CPTPP의 주요 참가국이다. 대선 기간 주간경향과 만난 윤석열 캠프 관계자 역시 CPTPP 가입을 긍정 검토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문가들은 국익만 고려한다면 한일관계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문제는 역사 문제로 얽힌 국민의 불편한 감정이 명분을 압도한다는 점이다. 박 교수는 “한일관계를 단순히 쌍무적 양자관계로만 접근하면 국민을 설득하기 쉽지 않다”며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중장기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윤 당선인이 내놓은 해답은 ‘김대중(DJ)-오부치 선언 2.0’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10월 8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일본 도쿄 영빈관에서 교환하고 악수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DJ는 어떻게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나

DJ 정부의 대일정책을 계승하려는 보수 정부의 움직임을 두고 대선과정에서 만난 이재명 후보 측 인사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의 한일관계를 보면, 윤 당선인이 왜 DJ를 언급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DJ 정부 출범 당시 한일관계는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발언이 잘 보여준다. 일본 역시 새 정부 출범 한달 전 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하며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당시 DJ의 태도는 단호했다. 일본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권 탄생을 코앞에 두고 매우 모욕적인 일”이라며 “취임 이후 한일관계를 잘해보려고 했는데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DJ 정부는 한일관계 개선에 나서야 했다.

외환위기 극복과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일본의 협조가 필요했다. DJ는 대통령 취임식 참석을 위해 방한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를 만나 한국의 위기극복을 위한 일본의 기여를 요청했다. 또 다케시다 노보루 전 총리에게 “남북관계와 경제적 이해관계 등 여러 문제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밀접히 강화하는 게 한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한일관계를 복원해야 한다는 DJ의 의지는 취임 후 약 8개월 만에 일본과의 공동선언 도출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알려진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다. 당시 외교통상부 동북아1과 서기관으로 공동선언 기획 및 추진에 참여한 조세영 전 동서대 일본연구센터 소장의 회고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공동선언에서 ‘과거사’, ‘대북정책’, ‘경제협력 강화’ 등 세가지에 가장 역점을 뒀다.

DJ 정부는 일본의 과거사 반성과 사죄를 관계개선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과거와 달리 사죄를 문서화하고 양국 정상의 서명을 제안했다. 일본은 사죄에 대한 한국의 ‘긍정적’ 평가를 전제로 동의했다. 결국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일본의 사죄를 문서화한 최초 사례가 됐다. 각각 상대가 수용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낸 전략적 행보의 결실이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합의에 이르자 정치, 안보, 경제, 인적·문화교류 등의 후속합의가 따라왔다. 당시 맺은 총 11개항의 원칙은 지금까지도 한일협력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조양현 국립외교원 교수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IMF 사태라는 경제 위기와 북한의 군사도발이 있었다”며 “미중 전략경쟁으로 국제경제가 불안정하고, 북한이 도발을 재개한 현재 상황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일관계는 과거사 문제도 있지만 전략적 협력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무엇이 국익을 극대화하는지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3월 30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제1537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참석자들이 역사 왜곡을 비판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윤 당선인은 DJ가 될 수 있을까

‘김대중-오부치 선언’도 상황적 한계는 있다. 사죄에 대한 한국의 긍정적 평가를 두고, 일본 보수세력은 ‘과거사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해석한다. “미래지향적 관계를 지향한다”는 문장을 놓고서도 ‘한국은 일본에 더 이상 사죄 표명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한일관계 개선은 과거사 문제를 ‘주변화’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또 오랜 기간 집권을 준비했던 정치인 DJ와 검찰총장에서 대통령으로 직행한 윤 당선인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DJ는 확고한 역사인식을 여러차례 밝히며 공동선언 도출 과정에서 실무진들이 참고할 만한 이정표를 만들었다. 조 전 소장은 “대통령이 처음부터 외교정책의 상세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무진은 그 기조에 따라 실천방안을 잘 준비하기만 하면 됐다”며 “참모와 실무조직이 성안한 내용을 대통령이 받아서 자신의 정책으로 삼는 것이 보통인데 당시에는 순서가 바뀐 셈이었다”고 술회했다. 윤 당선인이 당시 DJ 수준의 외교적 혜안을 갖추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보수 정부가 한일관계에 전향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친일’이라는 정치적 공세에 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북관계는 보수 정부가, 한일관계는 진보 정부가 풀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윤 당선인이 말하는 김대중-오부치 선언 계승은 당장 실현 가능하다기보다 장기적인 목표 개념으로 봐야 한다”며 “일본 내에서도 윤석열 정부 아래서 한일관계가 개선될 거라는 기대는 크지 않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일 양국의 과거사 문제는 진보 정부가 해결하지 않는 한 두고두고 계속해서 논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은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일본은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다. 양국의 정치 일정이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한일관계 개선의 계기를 마련하기는 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다만 5월 한국 대통령 취임식과 도쿄에서 열리는 쿼드 정상회담이 첫 번째 전환점이 될 거라는 분석은 있다. 손 원장은 “기시다 일본 총리나 윤 당선인 입장에서 한일 갈등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다면 양쪽 모두 선거에 큰 호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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