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문제와 동아시아

한겨레 2022. 4. 2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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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8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대 러시아 추가 제재 조처를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세계의 창] 야마구치 지로 | 일본 호세이대 법학과 교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다. 일반 시민들의 죽음을 전하는 뉴스가 매일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쏟아진다. 올해 봄은 슬픈 날이 계속된다. 러시아군의 잔학한 살육은 전쟁범죄이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책임은 중대하다. 하지만 그를 국제법정에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의의 추구와 인명의 존중은 안타깝게도 ‘이율배반’의 상황이다. 지금 우선해야 하는 것은 가능한 한 빨리 휴전을 이뤄내 사람들의 희생을 더 이상 늘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크라이나 문제는 일본과 아시아의 안보를 둘러싼 논의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일본에서는 최근 20년 동안 중국의 군사력 증강과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로 외교·안보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커져 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런 목소리를 더욱 키우고 있다.

일본이 주목하는 것은 독일의 정책 변화다. 전쟁 전 독일은 우크라이나 군사지원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자, 급속히 정책 전환을 추진했다. 방위비를 대폭 늘리는 동시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도 확대했다. 독일은 일본과 같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체주의 침략국으로, 패전 뒤 군사적으로 저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공헌을 의미했다. 이런 독일이 최근 군사적으로 적극적 자세를 보이고 있는 만큼, 일본도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일본과 독일은 입장이나 환경이 크게 다르다. 첫째,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등 자국의 잘못에 대해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반성하는 동시에 보상함으로써 유럽 사회 복귀를 허용받았다. 이런 이유로 과거 나치에 정복당한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의 위기 상황에서 독일을 향해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독일은 자국의 이익과 국제정의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기 전,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이라크 전쟁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정치·군사적 존재감이 커지는 속에서도 지성과 판단력이 존재한다.

셋째, 독일은 난민 수용에 있어서도 앙겔라 메르켈 정권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일본은 독일과 대조적이다. 전쟁, 식민지 지배와 관련해 역사 수정주의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정부와 여당의 중추에 있어 교과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거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둘러싸고 자기중심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역사인식을 둘러싼 엇갈림은 일-한 관계 악화의 핵심 원인이다.

또 일본의 외교는 미국을 추종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으며, 자국의 이익을 스스로 생각해본 사례는 북한과 국교 정상화 교섭을 시작했을 때 정도다. 난민 문제에 소극적인 것은 대내외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경제성장의 정체가 계속되는 가운데 국제공헌에 대한 의지도 최근 30년 동안 크게 저하됐다.

일본이 독일을 따라 방위비를 크게 늘리고, 군비를 강화한다면 그 자체가 동아시아의 긴장을 고조시키게 된다.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비롯해 ‘적기지 공격 능력’ 보유, 핵 공유 등 기존의 방어 중심의 안보정책으로부터 크게 벗어나는 정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독일과 달리 이웃 국가들이 이런 방위 정책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침공이 중국에 비슷한 군사적 행동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북한이 미사일 개발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일본 내에서 전쟁 포기를 명시한 헌법 9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전쟁은 엄청난 죽음과 파괴만을 초래할 뿐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사람 목숨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나라들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대화의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 일본이 우선적으로 나서야 할 것은 일-한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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