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욱의 기후 1.5] 과학이 증명한 기후위기에 정치가 끼어들 때 (하)
IPCC 6차 평가보고서의 '마지막 보고서' 발표
IPCC 워킹그룹 III의 6차 평가보고서, 그래픽으로 살펴보기
195개국 집단지성의 만장일치를 뒤집은 인수위의 근거는?
지난 4일,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에서 새로운 보고서가 공개됐습니다. 워킹그룹 III(제3실무그룹)의 6차 평가보고서입니다. 지난주 연재에선 6차 평가보고서의 주요 내용들을 살펴봤습니다. 195개 회원국에서 모인 실무그룹이 2015년부터 전 세계 각국에서 진행된 관련 연구자료들을 취합하고, 이를 종합해 195개 회원국이 모두 만장일치 한 내용만을 담은 보고서였습니다.
보고서에 담긴 현실과 미래는 이전보다 더 팍팍해졌습니다. 이미 오늘날 지구 평균 기온은 기준점인 산업화 이전(1850~1900년) 때보다 1.09℃ 올랐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각국이 내놓은 2030년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달성한다고 했을 때, 그에 따라 탄소중립 시점이 2065~2070년 즈음으로 늦춰졌을 때, 우리는 1.5℃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실패하고 맙니다. 온실가스 감축의 고삐를 죄지 못하고, 감축의 큰 부담 없이 2095년 즈음에서야 50% 감축을 하면, 2100년 지구의 평균 기온은 기준점 대비 무려 2.7℃나 높아질 것으로 나타났죠.
'기술을 통한 기후위기 극복'이라 불리는 원자력과 CCS의 경우, 결과가 썩 좋지 못했습니다. 이 둘을 합친 감축량은 태양광 발전을 통한 감축량의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원자력의 경우, '그게 무슨 감축 옵션이냐' 비아냥의 대상이 된 '메탄 배출을 줄인 석유 및 가스'보다도 효과가 작았죠.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의 평가가 엇갈린 측면은 가성비만이 아니었습니다.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UN은 17개 지속가능발전목표(SDG)를 만들었습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두가 더불어 공생하기 위해 달성해야 하는 목표를 종류별로 나눈 것이죠. 총 7개의 발전부문 감축 옵션 중 SDG에 가장 많은 긍정 영향을 미친 옵션은 풍력과 태양광이었습니다. 원자력의 경우 SDG 8 '양질의 일자리와 경제성장', SDG 9 '산업, 혁신, 인프라' 단 두 가지를 제외하곤 100% 긍정 영향을 미치는 것이 없었습니다. 또, SDG 6 '깨끗한 물과 위생'에 있어서 CCS와 함께 7개 옵션 가운데 유일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옵션으로 분류됐습니다. 양적 평가와 질적 평가 모두에서 발전부문 7개 주요 감축 옵션 가운데에 하위권에 머물렀습니다. 사실상 원자력과 CCS는 '감축 옵션 항목에 포함됐다'는 것 외엔 크게 내세울 것이 없는 셈이죠. 원자력과 CCS가 발전부문의 온실가스 감축에 있어 '메인 스트림'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원전의 기저발전화'를 넘어 '원전의 발전믹스주력화'를 외치는 주장이 '메인 스트림'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물론, 주장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IPCC와 195개 회원국이 과학과 숫자, 데이터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과는 달리 국내에선 '정치'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죠.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는 '프레이밍'으로 여론을 형성하면, 그 여론을 바탕으로 나름의 당위성을 얻는 방식입니다. 195개국의 집단지성, 그들의 만장일치를 뛰어넘는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게 다 탈원전 때문'이라는 표현은 정권 교체를 앞둔 시점에서 다시금 불거져 나왔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전기요금 상승 압박이 커졌다는 겁니다. 하지만 최근 3년간 우리나라의 원전 발전량은 꾸준히 증가해왔습니다. 2020년 기준, 원전 발전량은 160.2TWh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탈원전 선언'은 있었으나, 현실의 전력공급 구조에선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겁니다. '탈원전을 선언해놓고는 실천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탈원전 선언이 실제 정책으로, 발전믹스의 변화로 이어졌다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의 블랙아웃은 발전설비의 부족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이미 충분한 예비력을 확보해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이유에서 블랙아웃이 발생할까요. 바로, 수요 예측의 실패입니다. 블랙아웃이 발생했던 2011년 9월 15일, 이날 기록된 최대전력은 6만 7281MW로, 그해 9월의 다른 날들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고 바로 전날, 최대 전력수요는 크게 줄었죠. 평소 10% 안팎을 유지하던 전력 예비율은 19.4%에 달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15일에도 마찬가지로 전력 수요가 적을 것으로 예상했던 겁니다. 결국, 예년 수준 정도의 전력수요에도 적은 공급량 탓에 블랙아웃 당일의 공급 예비력은 5%에 불과했습니다. 갑작스럽게 공급과 수요의 격차가 줄어들자 긴급 순환 정전이 실시됐고, 갑작스러운 정전에 사회 곳곳은 큰 혼란이 일었습니다.
블랙아웃은 특정 발전원의 탓이 아닙니다. 수요 예측의 정확성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블랙아웃에 가장 취약한 발전원은 '경직성 전원'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수요에 맞춰 발전량을 신속하게 조절할 수 없는, 유연성 없는 전원 말이죠. 대표적인 경직성 전원은 바로 원전입니다. 순간순간 원자로의 출력을 조정할 수 없기에, 블랙아웃의 위기에서 그러한 경직성은 도움보다 도리어 위험요소가 됩니다.
독일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우리나라의 4배가 넘고, 원전의 발전비중이 우리나라보다 한참 높은 프랑스도 전기요금이 우리의 2배 이상입니다. 원전 비중이 높아져서 요금이 저렴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전기요금 체계가 비정상적인 것이죠. 발전비중과 상관없이 지금의 국내 전기요금은 의도적으로 억제된 상태입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여야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 어떤 정당도 이러한 비정상적인 가격 체계를 손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연재 〈[박상욱의 기후 1.5] '청사진'만 있고 '청구서'는 없다? 윤석열 당선인의 기후 정책〉에서 '원전의 기저발전화'라는 공약의 최소 견적을 소개해드린 바 있습니다. 35%의 발전비중을 달성하려면 2050년 최소 50기의 원자로가 아무런 사고나 문제없이 최대한 가동되어야 합니다. 지금보다 26기의 원전을 더 지어야 하는데, 건설비용으로만 최소 130조원이 필요합니다. 1980년대에 지어진 노후원전을 2050년까지 가동시키기 위한 개·보수 비용이나, 26기의 원자로가 들어설 부지를 찾고, 지역사회와의 협의를 이끌어 내는 데에 투입되는 비용은 모두 제외한 비용입니다. 당시 연재에선, 이처럼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는 정책을 공약하면서도 전기요금 동결 등을 약속했다는 점을 강조해드렸습니다. '전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전기요금을 올릴 수밖에 없다'며 책임을 전가할 상황이 아닌 것이죠.
앞선 연재에서도 거듭 설명해 드렸듯, IAEA(국제원자력기구)와 IEA(국제에너지기구) 조차도 2050년 글로벌 원전의 발전 비중을 9%대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들조차 발전의 메인 스트림은 재생에너지(2050년 발전비중 68.6%)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죠. 그저 어림짐작으로 나온 숫자가 아닙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연구하고, 수십, 수백 페이지의 보고서를 통해 밝힌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재생에너지 발전비중 70%의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10년 가까이 제주도에서 탄소중립을 위해 재생에너지 비중을 최대한 끌어올렸는데, 18%였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항상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한…” 그런데, 해외에도 사계절은 분명 존재합니다. 적어도, 우리와 위도가 비슷한 지역에선 말이죠. 그럼에도 어릴 적부터 맹목적으로 주입된 지식에 해외여행을 통해 온갖 계절을 몸소 경험하더라도 이 인식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습니다.
육상풍력 역시 충분한 잠재력을 보였습니다. 위도가 높은 독일의 북부지역은 평균적으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유리한 입지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따라 나 있는 바람길의 경우, 도리어 독일의 북부지역보다 더 나은 잠재력을 지녔습니다. 이 지역에선 독일과 맞먹는 고효율 풍력 발전이 가능한 것이죠.
풍력발전과 태양광 발전의 특징은 '분산형 전원'이라는 점입니다. 어느 구석에 오염물질이나 위험요소를 지닌 발전소를 두고 전국 각지에 전기를 보내는 '집중형 전원'이 아닌,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곳곳에 위치한 발전원인 것이죠. 이런 측면에선 오히려 우리나라가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발전망과 송·배전망을 구축하기에 더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부지방의 전기는 남부지방에서, 중부지방의 전기는 중부지방에서 효율적으로 발전하고 송전할 수 있는 환경인 겁니다.
원전이 기저발전원이 됐을 때, 심지어 30% 넘는 발전비중을 차지하는 기저발전원이 되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35%라는 발전비중이 가져올 50기의 원자로는 곧 3면의 바다 거의 모두에서 원전이 가동된다는 뜻이죠. 이는 비단 '리스크'의 차원을 뛰어 넘는 이야기입니다.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일이죠. 이미 글로벌 전력 시장에서 각각의 발전원별 발전단가가 어떠한지 답이 나와있습니다.
또한, 전력망 차원에서도 이로 인해 야기될 문제가 무엇인지 이미 국제사회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문제와 대응책에 대해선 추후 연재를 통해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195개국의 집단지성이 만장일치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외친 것은 그저 감성에 젖은 주장이 아닌 겁니다.
우리가 그간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 한 사이, 글로벌 시장에선 여러 기업들이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때 '태양광 글로벌 1위'였던 우리나라 기업의 순위는 7위로 밀려났습니다. 풍력 발전의 경우, '글로벌 Top 10' 순위표에서 국내 기업은 단 한 곳도 이름을 올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익을 위해서'라는 설명 또한 그 의미가 애매모호합니다. 원전의 운영사도, 원자로의 공급사도 모두 독점 체제입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운영사는 한국수력원자력 한 곳, 원자로 공급도 두산중공업 한 곳이 도맡고 있죠. 원전의 건설은 지금껏 현대건설(14기), 동아건설(6기), 대우건설(4기)만 참여했을 뿐입니다. 똑같은 세금을 투입했을 때, 실제 '국익'이 더 큰 것은 어느 쪽일까요. 제한된 시장에 제한된 기업이 참여하도록 돕는 일일까요. 아니면 더 많은 기업들이 더 넓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일까요.
진영 논리에 따라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을 구분 지으려는 주장 또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원자력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세계에서 21번째로 핵 발전국 대열에 참여하게 돼 과학 한국의 모습을 자랑하게 됐다. 이제 우리는 태양열과 조력, 풍력 등 새로운 자원을 연구, 개발하는 데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힘써야겠다.”
1978년 고리 원전 1호기 준공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국내 최초의 원전이 만들어진 자리에서 원자력계에 대한 격려에 이어 '새로운 과제'를 제시한 겁니다. 또한, 지금의 글로벌 재생에너지 시장은 말 그대로 '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는 시장 중의 시장입니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가 아닌, 국가 차원에서 패권을 쥐기 위해 모두가 혈안인 상황에서 이 시장을 외면하는 결정에 대한 책임은 과연 누가, 어떻게 질 수 있을까요.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에너지전환에 나서는 것은 원자력계를 궁지로 몰아넣거나 원자력 기술을 천시하려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그러려는 시도를 하는 쪽이 있다면, 그 역시 비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원자력과 관련한 학문과 기술은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엑스레이를 비롯해 암 치료 등 의학 측면에서도 큰 도움을 받고 있죠. 시민사회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라돈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원천기술도 관련 학계의 몫입니다. 건설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비파괴 검사 등 원자력 기술은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에너지만이 전부가 아닌 것이죠.
이러한 시스템의 문제는 원자력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관-기업-학계의 전문성에 기반한 탄탄한 시스템이 구축된 원자력계가 스스로의 견제와 감시에 부실했다면, 재생에너지의 경우 아직 '시스템의 구축' 자체가 이뤄지지 못 한 상태입니다. 전문성에 기반한 탄탄한 시스템을 통해 건전한 성장을 도모해야 하죠. 그러지 못 한 상태에서 서둘러 양적 팽창만 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보조금 잔치가 곳곳에서 펼쳐지고, 보조금 '루팡'이 곳곳에서 넘쳐날 겁니다.
지난 22일은 지구의 날이었습니다. 기후변화 대응은 더 이상 '빨간 수은주를 물고 땀을 뻘뻘 흘리는 지구'를 살리고, '삐쩍 마른 북극곰'을 살리는 수준의 일이 아닙니다. 당장 우리의 의식주 모두를 위협하는, 국가 경제와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는 '현실 속 위협'이 된지 오래입니다. 왜 미국과 유럽은 2030년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1990년 대비 ○○%'라고 했을까요. 그러다 우리는 어쩌다 2030 NDC를 “2018년 대비 40%”로 정했을까요.
서구 열강들이 기후변화의 심각성, 온실가스 감축의 중요성을 30년 넘게 숨겨오다 이제야 밝혔기 때문일까요. “미국과 유럽이 탄소세를 적용하면 국내 산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는 국내 기관의 분석과 언론 보도가 나온지 30년이 넘었습니다.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온실가스 감축 계획을 수립하고, 청정에너지 보급을 확대하고, 에너지 저소비형 산업구조로의 전환을 꾀하는 범정부 대책기구”가 처음 만들어졌던 것은 1998년의 일입니다.
이와 같은 온갖 경고와 대책 마련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우리나라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2018년까지 줄곧 늘어만 갔을까요. 30년 넘는 시간 동안 이러한 경고를 무시해오다 이제서야 갑작스런 감축의 부담을 우리 모두가 짊어지게 됐음에도 왜 지금까지 그 책임을 아무도지지 않고 있는 걸까요. 앞으로의 미래 권력은 이제라도 제대로 책임지려 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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