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가 곧 트라우마.."그래도 말해야 하기에" [세월호 8주기①]

조재영 jojae@mbc.co.kr 입력 2022. 4. 29. 09:28 수정 2022. 4. 2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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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5일과 16일, 세월호 참사 8주기를 맞아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갈 곳 잃은 세월호 기억 공간', '"우린 잊지 않았어" 8주기 기억식', '고통 속에서도 '연대'하는 이유' 를 연속 보도했습니다. 특히 트라우마를 승화시키는 '외상 후 성장'을 방송에서 처음 소개하기도 했는데, 이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피해자들의 고통이 끝났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평생 떨쳐낼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타인을 돕고 힘이 되려는 이들의 노력과 비교했을 때, 8년 동안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답해 왔는지, 대체 어떤 부분이 나아졌는지를 묻고 돌아봐야 한다는 부끄러움이 컸습니다. 방송에 다 담지 못한 그분들의 이야기를 사흘간 취재 후기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8년 전 4월 16일, 세월호에 탔던 단원고 학생 325명 중 250명이 희생됐습니다. 생존자는 단 75명.

매년 4월이면 세월호 추모 기획 기사를 준비하기 위해 기자들이 생존 학생을 섭외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 시도는 대개 번번이 실패합니다.

참사 당일 생존 학생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간신히 탈출했고, 친구들과 선생님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때 현장에 있던 많은 기자들이 학생들에게 다가가 "혹시 배 안에서 찍은 휴대폰 영상 줄 수 있냐"를 집요하게 물어봤습니다. "영상만 제공하면 굉장히 큰 돈을 줄 수 있다"고 말한 기자도 있었습니다.

"내가 친구 ooo의 가족"이라고 거짓말로 속여서 생존 학생과 통화를 한 뒤, 그 녹취를 방송에 쓴 기자도 있었습니다. '전원 구조' 오보를 시작으로, 그 수많은 일을 경험한 생존 학생들이 언론과 인터뷰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생존자 75명 중에, 단원고 2학년 1반이었던 장애진(25) 씨가 있습니다. 애진 씨는 현재 경기도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2년째 근무 중인 응급구조사입니다.

애진 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된 업무와 야근을 하는 와중에 이번 인터뷰 요청에 응해 주었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건 항상 똑같아요. 제가 발언을 하는 이유는, 친구들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찾기 위해서 하는 거거든요. 우리 부모님들도 그렇고.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일어날 거란 보장이 없잖아요. 그래서 사회에 이런 걸 기억하고 잊지 않아야 된다는 점을 계속 말해주고 싶어요."

누구든 한 명은 말해야만 하기에, 애진 씨는 그 '한 명'의 몫을 담담하게 8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기자: 벌써 8년이 지났습니다)"벌써 8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빠(4·16 세월호 가족협의회 장동원 총괄팀장)랑 진상규명 하자고 했을 때부터 최소 10년은 생각해서, 저희가 큰 상대랑 싸우고 있는 거니까. 광주 민주화운동도 정부랑 몇 십년을 싸웠으니까, 그래서 '아직 8년'이라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달력을 보면 '아, 이제 4월이구나' 이러면서 친구들 생각이 더 많이 나요. 그걸 딱히 참으려거나 하진 않고 그냥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그렇게 있어요, 저는."

떠난 친구들을 잊지 않기 위해 손목에는 사라지지 않을 리본을 새겼습니다.

"고등학교 때 어떤 음악 프로그램을 봤는데 래퍼가 세월호 타투를 하신 거예요. 당사자가 아니고 제삼자인 사람인데 그걸 기억하려고 타투를 새긴 것도 되게 신기했고.. 팔찌나 이런 건 끊어질 수 있고 해질 수도 있잖아요. 몸에 새기면 이건 없어지지 않으니까. 아빠랑 같이 했어요."

애진 씨는 원래 아이들을 너무 좋아해서 유아교육과를 지망하던 학생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후 애진 씨의 진로가 달라졌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응급구조학과가 있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참사 이후 관심을 갖게 됐어요. 위기 상황에 초기 대응을 하는 일이기도 하고. 제가 세월호 참사 이후에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여러 국민들이 저희 친구들을 위해서 많이 활동도 해주시고, 그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사회에 돌려주고 싶어서 응급구조학과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기자: 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심폐소생술 위주로 많이 해요. 심정지 환자가 오면 대부분 심장 압박이나, 기계로 처치하는 일이요. 저희가 다 처치했는데 환자분이 다행히 살아서 중환자실에 입원하시거나, 나중에 그 환자분 차트 찾아봤을 때 일반 병실로 가서 걸어나가시는.. 그런 경우를 봤을 때 제가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하지만 최선을 다해도 살리지 못한 환자의 경우, 그 보호자를 보면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가까운 사람을 잃었을 때의 심정을 알기 때문에 더 그렇다고 합니다.

어쩌면 본인이 갖고 있는 트라우마가 더 심해지는 건 아닐까? 그래도 이 직업을 택한 걸 후회한 적은 없다고 합니다.

"응급구조사라는 직업이 우리나라에 생긴 지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어요. 삼풍백화점 참사 이후부터 체계가 잡혀나가기 시작해서..지금 제가 있는 병원에는 응급구조사가 3명 있어요."

그 3명 중 본인이 막내인데, 10년 넘는 경력의 선배가 너무 능숙하게 일을 해내는 걸 볼 때마다 존경스럽고,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계속 노력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기자: 혹시라도 배나 바다를 연상하면 트라우마가 있거나 그렇진 않나요?)"트라우마가 바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까 항상 조금 불안하긴 해요. 혹시나 나중에 내가 너무 힘든 일이 있을 때 갑자기 그때 나타날까봐..그런 걸 모르는 거니까요." "제가 배를 타보긴 했거든요. 작은 배는 그래도 괜찮았어요. 근데 큰 배는 잘 모르겠고, 한 번도 탄 적이 없어요. 아, 그런 경우는 있었어요. 학교 다닐 때 스킨스쿠버를 했었는데 그때 수트를 입고 오리발을 차고 마스크를 낀 상태로 앞에까지 수영을 하래요. 근데 바다에서 하는데, 바다가 너무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그냥 돌아와서 못 하겠다고.."

애진 씨는 20대 중반, 2년차 직장인으로서도 고민이 많아 보였습니다. 아직 사람들이 응급구조사라는 직업을 잘 모르고, 모든 병원에 응급구조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정규직이 아니라 비정규 계약직이기 때문에 급여나 지위도 불안정하다고 합니다. 그런 환경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자신의 일을 더 잘 해내고 사람들을 더 많이 도울 수 있을까, 이게 애진 씨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심폐소생술을 할 정도의 중환자라면 처치 당시에는 의식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의사도 간호사도 아닌 애진 씨를 끝내 알지 못하고 퇴원하는 일이 많을 것 같았습니다. 온 힘을 다해 살려낸 환자가 나의 존재조차도 모른다면 조금은 서운하지 않을까. 애진 씨는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괜찮다"고 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면서, 세월호 참사 당시 언론사들의 취재 행태와 '보도 참사'에 대해서,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을 사과를, 그래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애진 씨는 "모든 기자들이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느냐, 괜찮다"고 오히려 저를 위로하면서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조재영 기자 (jojae@mbc.co.kr)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news/2022/society/article/6363908_3567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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