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위로하던 스승, 뒤에선 애인과 나 갈라놔..장례식 앞두고 심경 복잡 [씨네프레소]

박창영 2022. 4. 30.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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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씨네프레소-32] 영화 '시네마 천국'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천국은 아마 도서관 같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서광다운 상상이었다. 50대에 선천성 약시로 실명한 뒤에도 서점직원 도움으로 독서했다고 알려질 정도로 책을 사랑했던 보르헤스로선 책이 없는 천국을 그리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책으로 빚어진 사람, 어쩌면 책 그 자체였던 것이다.

영사 기사 알프레도(왼쪽)와 토토(오른쪽)는 영화를 매개로 우정을 쌓아간다.<사진 제공=왓챠>
'시네마 천국'(1988)은 영화로 빚어진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동네 소극장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에서 영사 기사로 일하던 알프레도와 그에게 어깨 너머로 영사 기술을 배우던 토토를 통해 영화가 두 사람의 인생에 어떤 의미였는지 살펴본다. 영화는 그들 삶에 생동력을 불어넣어줬지만, 한편으론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하나씩 포기하게 만들었다. 영화가 없었다면 더 행복해졌을지도 모를 두 남자가 상상한 천국은 영화관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알프레도(왼쪽)는 영화관에 화재가 나며 시력을 잃는다. 과거 필름은 불에 취약했다. 그는 영화 일을 하기로 한 결정을 후회했을까.<사진 제공=왓챠>
성공한 영화감독의 텅 빈 내면

영화는 한 남자의 고독한 침실을 비춘다. 중년의 토토는 영화감독으로 대성했지만 영혼은 메말라 있다.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하는 그는 계속 다른 여자를 만난다. 여자들도 그의 부와 유명세에 이끌릴 뿐, 인간 토토를 사랑하진 않는 것 같다. 이런 그에게 고향으로부터 부고가 전해지면서 토토는 더욱 심란해진다. 그에게 영사 기술을 가르쳐줬던 알프레도가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토토는 '시네마 천국'에서 그와 쌓았던 추억, 그리고 아팠던 기억을 떠올린다.
알프레도는 토토를 아들처럼 데리고 다니며 삶의 지혜를 가르친다. 그가 가르치는 지혜는 대부분 영화에서 배운 것들이다. <사진 제공=왓챠>
사실 토토는 어린 시절 궁핍했다. 전쟁터에 간 아버지는 몇 년 째 소식이 없었다. 하지만 결코 불행하지 않았던 것은 영화, 극장, 그리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 덕분이다. 토토네 집만큼이나 못 살던 이웃들도 영화관에 앉아선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다. 토토의 욕망은 영화를 감상하며 즐거워지고 싶다는 것을 넘어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고 싶다는 쪽으로 확장된다. 그의 시선은 입으로 영화를 내뿜는 사자머리 영사기가 있는 영사실로 향한다.
토토네만큼이나 가난했을 마을 사람들도 영화관에서만큼은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토토는 영화를 즐기는 사람을 넘어서 영화로 남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다.<사진 제공=왓챠>
영사 기사인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영사 기술, 영화를 보다 깊이 있게 감상하는 방법, 연애할 때의 자세, 직업을 대하는 태도 등이다. 그 와중에 토토에게 큰 신세도 지게 된다. 영화관에 불이 나 정신을 잃었을 때, 토토가 작은 몸으로 자신을 끌고 나와준 것이다. 알프레도는 비록 시각을 잃었지만 삶을 계속 찬미할 수 있게 됐다. 알프레도는 토토가 지닌 심미안이 더 넓은 세상에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지지함으로써 그에게 진 빚을 갚으려 한다.
알프레도와 토토는 `시네마 천국`에서 고달픈 동네 사람들을 웃게 한다.<사진 제공=왓챠>
"성공하고 싶다면, 그 여자도, 우리 마을도 다 잊어라"

알프레도는 여러 방법을 통해 토토가 이 마을에 남아 있어선 안 된단 메시지를 전달한다. 토토가 엘레나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을 때, 알프레도가 들려준 이야기가 그렇다. 어느 공주가 자신을 흠모하게 된 보초병에게 100일 간 한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면 만나주겠다고 약속한다. 병사는 무려 99일 동안 잘 기다리다가 마지막 하루를 채우지 않고 그곳을 떠난다. 알프레도는 그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극장판을 기준으로 말해보자면 병사가 단 하루를 못 채우고 그곳을 떠난 속내는 끝까지 수수께끼로 남는다. (*감독판에서는 토토가 그 이유를 해석하는 부분이 나오지만, 이로 인해 여백의 미가 줄어드는 인상이 없지 않다.)
토토(왼쪽)는 엘레나를 사랑했지만, 알베르토는 이 사랑이 토토를 망칠 것이라 생각했다.<사진 제공=왓챠>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아마 조건을 충족해야만 쟁취할 수 있는 사랑은 하지 말라는 얘기였을 것이다. 병사는 자신이 100일을 기다리는 동안 공주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 되길 바랐던 것이지, 자신의 정성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공주가 90일이나 99일이 아닌 100일에 문을 열게 됐을 때, 병사는 자기 마음이 받아들여진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진다. 왜냐면 그것은 앞서 공주가 내걸었던 조건이 충족됨에 따른 보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꼬박 100일을 기다려야 마음을 받아주겠다는 자존심 상하는 조건을 받아들이며 병사가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듯, 공주도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선 100일이란 자기 기준이 차기 전에 문을 열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비바람을 맞으며 100일이나 자신을 기다리는 모습이 안타까워서라도 말이다.
토토와 엘레나 사이엔 경제적 계급 차이가 있다. 알프레도는 토토가 그것을 무리하게 넘으려다가 상처 받게 될 것이 걱정된다.<사진 제공=왓챠>
알프레도는 토토가 은행장의 딸인 엘레나와 연애하게 됐을 때, 사회적 지위와 부의 차이로 토토가 수많은 '조건절'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 걱정되지 않았을까. 상대방의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 끊임 없이 투쟁하듯 사랑해야 하는 상황 말이다. 그렇기에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권한다. 아들처럼 아꼈던 토토가 누군가의 선택을 하염 없이 기다리는 존재가 되기보단,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랐을 것이다. "로마로 가. 넌 세상을 거머쥘 수 있어. 여기서 너랑 수다 떨기 싫다. 멀리서 네 명성만 듣고 싶어." 그토록 아꼈던 토토를 자신의 곁에 머물지 못하게 함으로써, 알프레도는 자기 방식으로 사랑을 완성한다.
토토는 알프레도의 권유에 따라 마을을 떠나고 30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사진 제공=왓챠>
더 이상 상영되지 않는 필름처럼, 폐허가 돼버린 내 추억

중년이 된 토토는 그때 알프레도의 결정이 옳은 것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을 엘레나, 그리고 고향과 갈라놓은 알프레도의 결단으로 토토는 부와 명성을 얻게 됐지만, 누구와도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토토는 알프레도의 장례를 위해 며칠 간 고향에 머무는 동안 자신의 모든 추억이 허물어지는 것을 본다. 누구도 찾지 않는 영화관에서 할 일을 잃어버린 사자머리 영사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고, 걸려지지 않은 필름은 낙엽처럼 나부낀다.
알프레도의 장례식 때문에 다시 찾은 고향에서 그는 큰 슬픔에 빠진다. 사랑 대신 일을 선택하게 한 알프레도의 선택은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사진 제공=왓챠>
장례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토토는 알프레도가 자신에게 남겼다는 필름을 확인한다. 아마 그 선물을 품에 안은 순간부터 그는 작은 갈등에 빠졌을 것이다. 그 안에 알프레도가 어떤 메시지를 남겼을지 무척 궁금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알프레도도 사실 나랑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으면 어쩌지. 사랑 대신 일을 선택하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는 말이 담겨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알프레도마저 그렇게 느꼈다면 내가 지금껏 질주하듯 살아온 인생은 어디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까.'
알프레도가 남긴 필름엔 검열로 잘려나간 키스 신들이 담겨 있었다.<사진 제공=왓챠>
그러나 막상 스크린에 영사한 알프레도의 선물에선 온갖 키스 신이 나온다. 그건 과거 키스 신에 대한 검열이 심했을 때, 알프레도가 잘라서 모아뒀던 필름을 이어붙인 것이다. 자신에게 그 필름을 달라는 어린 토토의 성화에 알프레도는 지나가는 말처럼 나중에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알프레도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있다가 필름을 토토에게 남긴 것이다.
토토는 알프레도의 선물을 확인하고 감동을 받는다.<사진 제공=왓챠>
이 '키스 몽타주'는 마음에 울림을 준다. 알프레도가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건 직업 또는 사랑에 성공한 친구의 얼굴이 아니라, 좋은 영화를 보고 웃고 슬퍼하고 감동 받는 그 얼굴이었던 것이다. 이 필름은 되는 대로 이어붙인 게 아니라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보여주기 위해 편집 작업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키스 장면 사이 사이에 존재하는 리듬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끝(FINE)'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아마 그는 이 필름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토토야. 네가 어렸을 때 달라고 했던 키스 신 필름 있잖아. 이어놓고 보니깐 진짜 볼 만하더라. 혼자 보기 아까워서 남긴다."
`시네마 천국`은 그들에겐 진정한 천국이었다.<사진 제공=왓챠>
토토가 로마에 가서 온갖 명작을 볼 때마다 알프레도를 그리워할 때, 알프레도도 고향에서 영화를 보며 토토를 추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나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부정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받았던 토토에게 그것은 어떤 국제 영화제에서의 그랑프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상이었다. 그건 그가 지금껏 사랑했던 모든 영화가 자신에게 다가와 존경의 입맞춤을 남기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재밌는 영화를 볼 때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곤 한다. 좋은 작품을 보며 알프레도는 토토를, 토토는 알프레도를 그리워했다.<사진 제공=왓챠>
시네마 천국으로 떠난 중년의 토토

우리의 마음엔 늘 결핍이 있다. 우리는 레고를 맞추듯 어느 날 마침내 결핍을 다 채우는 데 성공하는 게 아니다. 바람과 파도에 깎여 나간 부분을 매번 손질하듯 계속해서 결핍을 채우며 살아가야 한다. 중년이 된 토토 역시 내면의 공허감으로 알프레도를 잠시 원망하기도 했지만, 아마 사랑을 택했더라도 또 다른 허무함을 느꼈을 것이다.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고, 부족한 건 그 자리에서 다시 채우면 그만이다. 알프레도가 남긴 다음의 말처럼 말이다. "무엇을 하든 그것을 꼭 사랑하고, 철부지 시절을 기억해라. 영사기 만지던 꼬마 토토처럼."
자크 페렝은 다양한 작품에서 열연했을 뿐 아니라, 연출자와 제작자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지난 21일 중년의 토토를 연기한 자크 페렝이 별세했다. 토토처럼 그도 영화가 세상의 전부인 것마냥 원없이 영화를 사랑하다 떠났다. '제트' '당나귀 공주' '모두 잘 지내고 있다오' '레미: 집 없는 아이' 등 숱한 작품에서 열연했을 뿐 아니라 '마이크로 코스모스' '히말라야 지도자의 어린 시절' 등의 제작, 다큐멘터리 '위대한 비상'의 연출을 맡았다. 그에 앞서 세상을 떠난 알프레도 역의 필립 느와레, 음악을 맡았던 영화음악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와 함께 있는 그곳이 진정한 '시네마 천국'이기를 바란다.
`시네마 천국` 포스터.<사진 제공=왓챠>
장르: 드라마·멜로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
출연: 필립 느와레, 살바토레 카시오, 자크 페렝
평점: 왓챠피디아(4.3/5.0), 로튼토마토 토마토지수(90%), 팝콘지수(97%)
※2022년 4월 29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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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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