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식량 무기화' 일상화..새 보호주의 물결 확산

방성훈 2022. 5. 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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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식품·비료 수출 규제 47건.."우크라戰 이후 급증"
러 에너지 제재→비료값 상승→곡물가 상승 '연쇄작용'
"연쇄 사이클 아직 진행중"..미국서도 식품지출 부담↑
"소득 대비 식품 지출 높은 빈곤국에 더 큰 부담"
WB "무역패턴 변화..원자재 상승 2024년까지 지속"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세계 각국이 앞다퉈 식량 무기화에 나서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이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같은 새로운 보호무역주의 물결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그 파장과 충격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밀 농장. (사진=AFP)

올해 식품·비료 수출 규제 47건…“우크라戰 이후 급증”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스위스 생갈렌대학의 사이먼 이브넷 국제 무역·통상 교수의 추적 결과를 인용, 올해 초부터 세계 각국이 식품과 비료에 대해 총 47개의 수출 규제를 부과했으며, 이중 43개는 2월 말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시행됐다고 보도했다.

이브넷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엔 식량이나 비료 수출을 제한하려는 시도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엄청나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새로운 보호주의 물결을 일으켰다는 얘기다.

우크라이나는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해바라기유, 밀, 귀리 및 소의 수출을 제한했다. 러시아도 비료, 설탕, 곡물을 다른 국가에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전 세계 식용유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는 인도네시아는 팜유 수출을, 터키는 버터, 쇠고기, 양고기, 염소, 옥수수 및 식용유 수출을 각각 중단했다.

NYT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서방의 대(對)러시아 제재가 각국 정부로 하여금 자국민들을 위한 식량 등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수출 장벽을 세우도록 만들었다”고 진단했다.

이어 “일부는 좋은 의도일지라도 팬데믹발(發) 공급부족·가격상승 속에 이러한 새 보호무역주의 물결은 각국 정부가 완화하려고 하는 인플레이션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고 전했다.

(사진=AFP)

러 에너지 제재→비료값 상승→곡물가 상승 ‘연쇄작용’

이브넷 교수는 보호무역주의 물결이 우크라이나 전쟁 주범인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밀 수출 규제로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몰도바, 세르비아, 헝가리 등 우크라이나 밀의 주요 무역로에 있는 국가들이 밀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했고, 연쇄적으로 레바논, 알제리, 이집트 등 식량안보 문제가 있는 국가들로 번지게 됐다는 설명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세계 밀 수출의 4분의 1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여름 중국에 이어 러시아까지 최근 비료 수출을 중단하면서 글로벌 식량 위기는 더욱 심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글로벌 원자재 가격이 상당 부분 서로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방의 제재로 에너지 가격이 상승했고, 천연가스로 생산하는 비료 가격이 올랐다. 이는 또 작물 재배 비용을 높여 농산물 가격을 상승시키고 있다. 밀 가격이 상승하면서 사람들은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쌀 가격이 동반 상승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팜유 수출 중단 역시 우크라이나의 해바라기유 수출 제한과 맞물려 글로벌 식용유 대란에 대한 공포를 키우고 있다. 나아가 팜유를 필수 원료로 쓰는 라면, 과자, 화장품 등 소비재 물가 상승을 유발할 수 있다. 이브넷 교수는 이러한 연쇄 사이클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며 “스페인, 그리스, 영국의 식료품점에선 이미 한 사람이 살 수 있는 곡물이나 식용유 양에 제한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은 미국에서도 물가 상승 부담이 지표로 확인됐다. 미 상무부가 지난달 29일 발표한 3월 개인소비지출(PCE)은 전년 동기대비 6.6% 상승했다. 이는 1982년 1월 말 이후 약 4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에너지 비용이 33.9% 폭증했고, 식품 가격은 9.2%나 올랐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지난 주 연설에서 “미국의 공급망이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안전하지도 않고 탄력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토로했다.

(사진=AFP)

“소득 대비 식품 지출 높은 빈곤국에 더 큰 부담”

세계무역기구(WTO)는 자국민들의 수요 충족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일시적 수출 규제는 허용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이 글로벌 원자재 가격 상승을 더욱 가파르게 끌어올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은 지난달 27일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경제적 상호의존성에 대한 의구심을 ‘정당하게’ 촉발했다”며 각국의 수출 제한으로 이미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는 곡물, 기름, 육류 및 비료가 더 비싸지고 더 구하기 어려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 식품 가격 상승은 소득에서 식품 지출 비중이 큰 빈곤국에 훨씬 더 큰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달 28일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식량 및 연료 가격 상승으로 심각한 충격에 직면해 있다면서, 경제성장 둔화, 국가부채 급증, 생활수준 악화가 우려된다고 꼬집었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선 밀 공급의 약 85%가 수입된다. 또 이들 지역의 소비자 지출에서 식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40%에 달한다.

전쟁이 장기화하거나 러시아에 대한 새로운 제재가 추가되면 식품 및 비료 가격이 더욱 치솟을 수 있어 우려를 키운다. 세계은행(WB)은 최근 보고서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무역 패턴을 변화시켜 2024년 말까지 원자재 가격이 높게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옐런 장관은 서방의 제재가 가격 상승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것을 의식한 듯 “비록 그것(보호무역주의)이 기업과 소비자에게 다소 더 높은 비용을 의미하더라도 미국은 대규모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그룹으로 무역관계를 재조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성훈 (bang@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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