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페이스, 연대의 자원을 제공하던 매체가 떠난 자리엔 무엇이 남을까[위근우의 리플레이]

위근우 칼럼니스트 2022. 5. 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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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연대의 동력 제공해온 매체 '닷페이스' 6년 만에 해산

[경향신문]

#우리는어디서든길을열지 지난해 6월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가 진행한 온라인 퀴어 퍼레이드에서 사용된 해시태그다. 코로나19로 더는 광장에서 모일 수 없는 상황에서 닷페이스의 신박한 기획과 추진력으로 문자 그대로 어디서든 길을 연 사례였다. 하지만 정작 온라인 공간을 통해 길을 열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던 닷페이스가 걷던 길은 벽에 막혔다. 지난 2일 닷페이스의 조소담 대표는 구독자인 닷페피플에게 보내는 메일을 통해 닷페이스의 해산 소식을 알렸다. 처음엔 잘못 읽은 줄 알았다. 당장 사흘 전인 4월29일엔 개인방송 플랫폼에서의 여성 BJ에 대한 성 착취적 메커니즘 문제를 고발하는 기사가 발행되었다. 6년 동안 길을 열어온 닷페이스의 매순간이 그러했듯, 다음 기사가, 다음 영상이 당연하게 발행되리라 생각했다. 조소담 대표의 메일엔 “자원의 한계를 크게 느끼고, 이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들었”다는 고백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의 고된 싸움이 눈에 띈다면, 그것은 새롭게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그의 길고 어려운 싸움을 이제야 비로소 내가 인식했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눈에 띄지 않도록 태연한 표정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역시 고된 싸움의 또 다른 면이다. 해산 소식을 접한 닷페이스의 독자 상당수가 고마움, 아쉬움, 응원만큼 미안함을 드러낸 건 그 때문일 것이다. 혹, 그 싸움이 외롭진 않았을까. 더 자주 고맙다 말하고 더 자주 힘을 보탰더라면, 오늘의 해산 소식은 없거나 좀 더 먼 미래의 일이 되지 않았을까.

‘현실을 서사로 만드는 논픽션 크리에이티브’를 표방한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가 지난 2일 해산 소식을 알렸다. 닷페이스는 2016년부터 우리 사회의 “문제를 알리고 당사자의 이야기를 담고 연대할 사람을 모으며” 변화를 도모해 왔다. 닷페이스 홈페이지 갈무리

닷페이스의 활동이 외롭진 않았을지 뒤늦은 걱정을 하는 것과 별개로, 많은 이들은 닷페이스를 통해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닷페피플’이라는 구독자 정체성, 온라인 퀴어 퍼레이드를 통한 퀴어 당사자 및 앨라이 서로에 대한 인식과 유대감 때문만은 아니다(물론 매우 중요하다). 매체로서 닷페이스의 탁월함은 사회적 사각지대에서 정치적 소통 자원이 정당하게 배분받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를 구조화해 공간(公刊)된 담론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공론장 이론의 대가 위르겐 하버마스는 <사실성과 타당성>(한상진·박영도 역)에서 “공론장의 의사소통 구조는 사적 생활영역과 연결되어 있어서, 시민사회적 주변부가 정치의 중심부에 비해 새로운 문제 상황을 지각하고 확인할 수 있는 감수성을 훨씬 더 많이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공론장의 매개를 통한 원활한 공적 의사소통만이 대의 민주주의가 그저 투표 활동 정도로 형해화되는 것을 막는다. 하지만 이처럼 사적 생활영역과 정치적 중심부를 매개할 공론장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으로서의 언론이 역할을 충분히 수행 중인지는 의문이다. 정치 인플루언서 이준석이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리는 혐오발화를 아무 논평도 없이 열심히 퍼나르거나, 사회적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 제대로 된 분석과 도덕적 관점 없이 ‘논란’ 혹은 ‘갈등’이란 표현으로 사안을 선정적으로만 소비하는 기사들, 그리고 그런 기사가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거대 포털 중심 언론 소비 환경에서, 시민사회 주변부에서 인식하는 문제의식은 유의미할 만큼 집적(集積)되어 가시화되기보단 산발적 발화로 끝나기 쉽다. 닷페이스의 매체로서의 민감성은 바로 그런 곳을 향했다.

닷페이스 홈페이지에는 ‘우리가 집중하는 문제들’로 젠더 다양성과 평등/디지털 환경에서 늘어나는 성범죄,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일할 권리/기후위기와 우리의 대처/다양해지는 개인, 가족의 삶의 형태와 뒤처진 태도/장애와 자유, 사회 접근성이 제시되어 있다. 물론 닷페이스의 노력을 차치해도 해당 주제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계약 안에서 실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장애인의 이동에 대한 자유와 권리가 여전히 찬반의 영역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한국에서, 닷페이스의 1년 전 영상 리포트는 65세가 넘으면 ‘장애인’에서 ‘노인’으로 분류되어 받을 수 있는 활동지원이 확 줄어버려 65세 생일이 원망스럽다는 장애 노인들의 절절한 목소리를 담아냈다. 또한 ‘추적단불꽃’의 집요한 추적과 일부 언론의 보도로 속칭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텔레그램 성 착취물 공유 범죄가 알려지고 모두가 그 일을 저지른 범인들에 대한 분노만을 불태울 때, 플랫폼 사업자로서의 텔레그램의 책임을 묻고 따진 것도 닷페이스였다.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다수가 듣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의제를 구성한다. 의제가 주류화된다면 그 안에서 새로운 사각이 발생하진 않는지 한 번 더 질문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얻는 이득은 명확하다. 세상의 모양을 더 높은 해상도와 덜 왜곡된 형태로 볼 수 있게 된다. 이미 사회관계망서비스의 수천수만 팔로어가 보고 듣는 유명인의 발화가 언론 보도를 통해 이중으로 공적 주목을 받고, 이미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는 이중으로 소외받는 의사소통 자원의 불평등 안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모습은 필연적으로 왜곡된다. 닷페이스 같은 매체의 노력은 소외된 이들이 시민으로서 동등하게 참여할 기회를 늘리기도 하지만, 다른 동료 시민들이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할 기회 역시 늘린다.

젠더 다양성, 평등, 기후위기 등
닷페이스가 집중한 문제의식들
주변부·소수 목소리 귀기울여
다수가 관심 가질 의제로 구성
세상을 덜 왜곡된 형태로 보고
더 높은 해상도로 보는데 도움
조소담 대표의 “한계” 표현
결국 우리의 문제이자 위기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 측에서 20대 남성 표를 얻기 위해 여성주의 관점 매체의 출연을 피해야 한다는 김남국 의원, 정치평론가 이동형 등의 목소리를 따라 닷페이스와 역시 진보 의제 형성을 위해 애써온 또 다른 뉴 미디어 씨리얼 출연을 취소 및 연기했다가, 올해 1월 닷페이스에 출연한 일은 그래서 다시 복기할 만하다. 심지어 김남국 의원은 소속 의원이 모인 단체 텔레그램방에서 “닷페이스 이런 곳 나가면 2030 여성표가 나오나요”라고 반문하며 이재명 후보의 출연이 전략적 패착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알 듯, 이재명 후보에 대한 2030 여성들의 강한 결집으로 비록 패배에도 불구하고 0.7% 차이라는 박빙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기괴할 정도로 온라인에서 과잉 대표된 2030 남성들의 반여성주의적 목소리를 근거로 페미니즘 이슈와 거리를 두자던 얼간이들이 잘못된 판단을 했다면, 그런 왜곡된 세계상으로부터 벗어나 닷페이스를 통해 직접 젊은 여성 유권자들과 대화하려 한 후보의 선택은 후보 본인과 유권자가 서로를 덜 굴절된 상으로 인식할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칼럼니스트 위근우

조소담 대표가 말한 “자원의 한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높은 확률로 재정 문제가 포함되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더 높은 퀄리티를 향한 인적 자원 수급의 어려움일 수도 있고, 정파적 입장이 선명할수록 유리한 영상 매체 시장의 불균형에서 조금이라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소진될 아이디어 같은 관념적 자원일지도 모르며, 이 시장에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신들이 믿는 가치를 지키느라 닳고 닳았을 정서적 자원 역시 포함될 수 있겠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닷페이스만의 ‘자원의 한계’가 아니다. 갈수록 소통을 위한 공통의 토대가 해체되는 지금, 사회적 연대를 위한 자원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위해 생산 및 부양해야 할 자원이다. 사회적 연대의 힘은 시민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린 논의의 맥락과 그에 따른 도덕적 자기결정을 통해 회복된다. 닷페이스 같은 매체가 사회에 제공한 게 그것이다. 하여 ‘자원의 한계’를 통감하며 그들이 떠나는 자리에서 사회적 연대의 자원 역시 한계를 드러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문제다. 나는 닷페이스에 대한 부채감에서 시작한 이 글을 고마움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직한 귀결은, 위기감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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