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형식 파괴가 혁신으로 이어지길 [열국지로 보는 사람경영]

장박원 입력 2022. 5. 1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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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승환 기자
[열국지로 보는 사람경영-107] 지난 11일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수석비서관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갑자기 '프리스타일'이라는 말을 던졌습니다. 자리에 놓인 원고를 보며 이런 말도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참모들과 회의하는데 이게 무슨 비효율적이고 어색한 모습인가. 여기 써준 것엔 '첫 번째 수석비서관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돼 있는데 무슨 법 개정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 복장도 자유롭게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하고…. 앞으로 카메라 찍을 일 없으니까 너무 점잖게는 하지 맙시다." 그는 비서진과 격의 없이 즉석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해 성과를 내면 그만이지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인데 역대 대통령과는 확실히 다른 면모입니다.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 부흥을 이끌었던 무령왕은 형식 파괴와 관습 타파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는 오랜 관행을 깨고 혁신을 이끌면서 강한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개혁은 기득권 세력인 귀족들의 반발을 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감하게 개혁을 밀어붙였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조세가'에는 이런 조나라 무령왕의 파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 무령왕이 즉위한 지 19년째 되는 기원전 307년 신년 벽두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무령왕은 3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군주였습니다. 그는 성년이 되고 나서부터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복 전쟁을 벌여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중국 전체를 호령하는 패자가 되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민족뿐 아니라 다른 제국들이 조나라를 얕보지 못하도록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일이 절실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그는 아침 일찍부터 신하들을 조정에 불러 마라톤 회의를 벌입니다. 토론을 겸한 신년 회의에서는 국정과 관련해 다른 사안들은 대부분 결정됐는데 딱 한 가지만 갑론을박이 이어졌습니다. 중국인들이 입던 전통 의상을 버리고 북방 이민족의 옷을 도입하는 방안이었습니다. 무령왕은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무릇 뛰어난 업적을 이루려면 세상의 관습을 위배했다는 책망을 받을 수도 있소. 그래서 말인데 과인은 조나라 전통 의상 대신 북방 이민족의 옷인 호복(胡服)을 백성들에게 입히려 하오."

무령왕은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전쟁에 참여하면서 기마전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나라를 비롯한 중원의 제후국들은 기마전을 과소평가했습니다. 당시엔 전투가 주로 수레를 타고 이루어졌습니다. 말이 끄는 수레 위에서 창과 활로 상대를 제압하는 게 보통의 전투 모습이었습니다. 전차에 해당하는 수레가 먼저 나가 싸우고 그다음 보병들이 백병전을 벌이면서 승패가 갈렸습니다. 말을 직접 타고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건 미개한 이민족이나 하는 전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마전의 파괴력을 애써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민족과 벌인 전쟁터를 누비며 현장을 목격했던 무령왕은 이런 편견을 깼습니다. 그가 보기에 기마전이야말로 최소 전력으로 많은 적을 무찌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조나라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말타기 기술을 익힌다면 강력한 기마 부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군사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복 개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권문세가는 물론 왕족까지 반대하자 무령왕은 정면 돌파하기로 작정합니다. 먼저 재상인 비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입니다. "과인이 호복을 입겠다는 건 적을 약하게 하여 힘은 적게 들이고 공을 많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도 의론이 분분할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소?" 무령왕의 간절함에 비의는 힘을 보태기로 결심하고 대답합니다. "일을 하려고 할 때 머뭇거리면 성공하지 못하고 행동할 때 주저하면 명예를 얻지 못한다고 하였지요. 주군께서 기왕 세상의 습속을 위배하였다는 비난을 감수하기로 하셨으니 무엇을 주저하십니까?"

하지만 공자 성을 비롯한 왕족들은 끝까지 개혁에 저항했습니다. 그러자 무령왕은 그들을 강하게 질타하며 거듭 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했습니다. "옛 성인들은 실제 상황에 따라 예법을 규정하였소. 법령과 제도가 각각 실제 필요에 부합되었고 의복과 기계는 각각 그 쓰임새가 편리하였소. 예법은 꼭 한 가지 방식일 필요가 없고 국가의 편의를 추구하는데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할 필요는 없소. 옛 법도만 따라가지고는 세속을 초월하기 어렵고, 옛날 학문만을 본받아가지고는 지금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오." 무령왕은 즉시 호복 보급 방안을 공표하고 말 타고 싸울 기병과 사수 모집에 들어갔습니다.

병력을 기병 중심으로 개혁한 결과 조나라의 군사력은 날로 강해졌습니다. 변경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전투에서 기병의 위력이 증명됐습니다. 무령왕이 예상한 그대로였습니다. 그러자 조나라에서 호복을 입는 사람이 점점 늘었습니다.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했던 개혁이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날 때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령왕은 호복의 도입과 기병 위주의 군사 대개혁으로 조나라를 당대 최고 국가로 이끌었습니다.

첫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가식을 버리고 실용성을 강조한 윤 대통령도 부강한 대한민국을 꿈꾸고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선 형식 파괴가 실질적인 혁신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조 무령왕이 기득권층인 귀족과 왕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을 추진했던 모습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청와대를 나와 용산 시대를 연 것도 파격으로 볼 수 있습니다. 파격이 파격에 그치면 쇼일 뿐입니다. 국민을 위한 혁신 성과로 결실을 보아야 의미가 있습니다.

[장박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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