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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가 만든 '위험한 신화'..대통령궁 입성한 '봉봉' 비결 [후후월드]

김홍범 입력 2022. 05. 15. 05:01 수정 2022. 05. 1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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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왼쪽)과 그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오른쪽)의 모습. [중앙포토, AFP=뉴스1]

1986년 2월 25일, 성난 필리핀의 성난 군중은 “마르코스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며 말라카낭궁(대통령 관저)의 담을 넘었다. 이날 21년간 장기 집권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그 일가는 헬기를 타고 관저를 빠져나가 하와이로 망명했고, 필리핀에는 민주화 정부가 들어섰다.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제3의 물결: 20세기 후반의 민주주의』에서 필리핀이 아시아 지역의 민주화 물결을 일으켰다고 했다. 필리핀의 ‘피플 파워’가 1987년 한국, 1988년 대만 그리고 1989년 중국의 천안문 민주화 항쟁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필리핀은 2월 25일을 특별 휴무일로 지정해 이를 기념하고 있다.

당시 28세의 나이로 하와이로 쫓겨났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64‧이하 봉봉)이 말라카낭궁의 주인 자격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필리핀 국민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면서 복귀했다. 그는 다음달 말부터 6년 임기의 필리핀의 대통령 직을 수행한다.

지난 5월 7일(현지시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 후보가 지지자들의 환호에 감사를 표하고 있다. [마르코스 주니어 페이스북 캡처]

지난 10일(현지시간) 대통령 당선이 사실상 확정되자 봉봉은 “국민을 위해 일할 것”이라며 “나의 선친이 아닌 나의 행동을 보고 판단해달라”고 일갈했다.

전날 치러진 필리핀 대선에서 봉봉은 3100만표 이상을 얻어 2위 레니 로브레도 현 부통령(약 1480만표)을 2배 이상 차이로 제쳤다. 부통령 선거에선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장녀 사라 두테르테가 3150만표를 얻어 당선됐다. 외신들은 “두 후보 모두 역사적 표차로 이겼다”고 전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왕조 정치' 속 힘 쌓은 봉봉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메르시 쿠오는 필리핀에서 모든 정치는 가문을 통해 이뤄진다고 했다. 필리핀의 정치는 미국식 민주주의 형식이지만, 대부분의 권력은 150개 정도의 유력 가문이 나눠갖는다. 필리핀 지방 관료의 약 80%, 국회의원의 약 67%가 필리핀 내 유력 가문 출신이라고 7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했다.

봉봉도 그의 아버지 마르코스가 사망한 뒤 1991년 필리핀으로 돌아와 이듬해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가문의 정치적 기반인 일로코스노르테주(州)에서 하원의원과 주지사·상원의원을 지냈다.

지난 11일(현지시간) 아버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찾아 눈물을 닦고 있는 마르코스 주니어의 모습.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페이스북 캡처]


18~40세 유권자가 52%, ‘SNS 과거 미화’ 나서


그는 선거 운동 진행 과정에서 TV 토론과 언론 인터뷰를 최대한 피하며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지지자들과 소통했다. 세계에서 SNS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필리핀인들은 선거 정보도 주로 SNS를 통해 얻는다. 2019년 기준 필리핀인은 하루 평균 4시간 1분을 SNS 사용에 썼다.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는 9일 블룸버그 TV와 인터뷰에서 “봉봉의 인기는 꾸준한 이미지 쇄신 작업의 결과물”이라며 “지난 2014년부터 시작된 가짜뉴스를 활용한 캠페인이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3월 12일(현지시간)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후보 유세장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과 그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의 사진을 들고 있는 젊은 지지자의 모습.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페이스북 캡처]

SNS 타깃은 독재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 유권자들이었다. 봉봉은 ‘다시 함께 일어서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아버지의 계획을 실현할 수 있다면, 싱가포르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SNS를 통한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며 독재자 마르코스의 과거 행적이 미화되기도 했다. 필리핀은 만연한 부패 속에 1983년 세계은행 등에 구제금융까지 신청해야 했지만, SNS에선 반대가 됐다. 19세의 미코엘 다베는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시대는 평화롭고, 멋지고, 통일된 시기였다. 그가 나라의 돈을 훔쳤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봉봉의 캠프는 가짜뉴스에 대해 “시민의 자연스러운 SNS 사용일 뿐 가짜뉴스와는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9일(현지시간)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투표를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 [AFP=연합뉴스]


'스트롱맨' 기대 정서 자극


민주화 이후 정권이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를 해소하지 못한 것도 원인이다. 필리핀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인구의 24%(약 2600만명)가 여전히 빈곤선 아래에 있다. 5년 전 통계에선 재산이 1만 달러(약 1286만원)를 넘는 인구가 전체의 14%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필리핀 기층에선 '스트롱맨'에 대한 욕구가 자리 잡았다. 필리핀 정치 분석가 리처드 헤이다리안은 “많은 국민이 필리핀 정치에 환멸을 느끼며, 과거에 대한 향수를 젖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2016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당선도 ‘스트롱맨’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크게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봉봉은 선거 기간 중 과거에 대한 반성 등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독재에 대해 부인하거나 오히려 “아버지는 정치적 천재”라고 주장했다. 어머니 이멜다를 향해서도 “최고의 정치인”이라고 했다. 일로코스노르테 투표소에 나타난 이멜다는 커다란 샤넬 브로치와 진주 팔찌를 착용하는 등 ‘삼천 켤레의 구두 ’로 대표되는 그의 사치는 그대로였다.

마르코스 일가가 독재 시절 해외로 빼돌린 자산은 약 100억 달러(약 13조원) 이상으로 추정되며, 이 중 40억 달러 정도가 환수됐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1972년 계엄령 선포 이후 약 7만 명이 구금되고 이 중 절반가량은 고문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32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필리핀 대선 투표가 진행된 지난 9일(현지시간) 이멜다 마르코스의 모습. 커다란 샤넬 브로치, 진주 장신구를 했다. [AFP=연합뉴스]


중국 견제 그물 구멍날까…긴장하는 美


봉봉 정권의 외교정책은 미국보단 중국에 더 가까워질 것으로 외신은 전망했다. 로이터 통신은 “미국보단 중국이 봉봉의 승리를 더 반기고 있다”며 “경제적 영향력 때문에 중국과 더 긴밀한 관계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필리핀이 친중국 정책을 펼치면, 남중국해를 무대로 중국과 세력 대결을 펼치고 있는 미국의 ‘대(對)중 해상 포위망’에 구멍이 날 수 있다고 CNN은 전했다. 봉봉은 하와이 법원이 1995년 마르코스 일가에 통치 기간 피해를 본 사람에게 20억 달러(약 2조5000억원)를 배상하라는 명령한 이후 미국을 찾은 적이 없다. 커트 캠벨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인도태평양 조정관도 11일 “최소한 임기 초반에는 소통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치 분석가 로빈 가르시아는 “미국이 필리핀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1975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중국과 수교를 시작한 이래 마르코스 일가는 중국과 좋은 관계를 맺어왔다. 봉봉도 사업 추진 차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은 11일 “미국은 이번 선거에서 봉봉을 ‘친중’, 다른 후보자들을 ‘반중’으로 분류해 친 중국 프레임을 씌웠다”며 “그는 경제와 고용에 가장 신경을 쓰는 필리핀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은 것뿐”이라고 보도했다.

중국과 갈등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과 남중국해 영유권을 두고 갈등을 빚는 것에 대해 “필리핀인은 중국을 믿지 말고, 필리핀의 이익을 수호해달라는 요구가 있다”고 미국 공영 라디오 NPR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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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범 기자 kim.hongbu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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