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찬의 인프라] 산업안전법 힘 못 쓰던 미국도 근로자 동참하자 재해율 51% 뚝

김기찬 입력 2022. 5. 17. 00:14 수정 2022. 5. 17.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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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한국에 노동조합이 생긴 건 1898년이다. 당시는 노조가 아니라 ‘조합’이라고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임금 근로자라는 개념이 희박했다. 일하는 사람은 고공(雇工), 임용사공(賃用私工), 용인(傭人, 광업)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임금을 받기보다 품팔이를 하고 식사나 물품을 받는 식이었다. 본격적인 임금 근로자는 부두와 광산을 중심으로 생겼다. 조합도 부두에서 첫 깃발을 올렸다.

최초의 파업 역시 부두에서 시작됐다. 1921년 부산 부두 조합이, 2년 뒤 부산방적 조합이 파업했다. 당시 파업 명분은 임금 인상이 아니었다. 일본인 감독자에 대한 감정적 반발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조합이 내세운 주요 요구사항은 산업안전이었다. 다치고, 숨지는 일이 비일비재한 데 대한 폭발이었다. 산업안전의 역사가 조합(노조)과 함께 태동한 셈이다.

안전에 대한 각성과 이에 따른 규제는 대체로 산업이 기지개를 켜고, 발전하면서 생겼다.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통치하던 1871년부터 경제가 급성장했다. 이때 산업안전 법규가 나왔고, 산업·고용구조의 변화에 맞춰 3~10년 단위로 계속 개정하고 있다. 산업발전과 안전이 이인삼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 현장 문제 가장 잘 아는 건 근로자
선진국, 노사 함께 안전매뉴얼 꾸려
미 노조, 안전수칙 어긴 조합원 퇴출

한국 100년 전 첫 파업은 안전문제
노조 안전활동 참여, 책임 나눠져야

1990년대부터 근로자 참여 확대

김기찬의 인(人)프라

산업안전 규제는 전 세계 어느 나라든 경영진에 무거운 책임을 지운다. 안전을 비용절감의 대상으로 보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다. 1990년대 들면서 이 기조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사용자에게 온전히 책임 지우던 방식에서 근로자의 참여를 확대하는 방향이다. 독일은 1996년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며 종업원평의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종업원평의회에 안전 관련 공동 결정권과 협의권, 자문권을 부여했다. 김영문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이 제도로 산업안전보건 조치가 실효성 있게 단행되고, 산재가 상당히 감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도 1970년 제정된 산업안전보건법(OSH Act)이 제 역할을 못 하자 1994년 노사 자율을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안전프로그램을 노사가 함께 꾸린 곳은 재해율이 51%나 감소(산업안전보건청·OSHA 발표)했다. 로라 시먼 OSHA 전략적 파트너십 팀장은 “새로 규제하는 법을 만들기보다 노사 참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안전 정책의 성격이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법과 현장의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선진국이 사용자를 겨누던 규제 방식 대신 자율과 자치로 선회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근로자여서다. 생명을 지키려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근로자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다.

한국은 중대재해처벌법 등 규제를 강화 중이다. 물론 예방 우선 원칙은 놓지 않고 있다. 비록 중대재해처벌법 때문에 법에 정한 산더미 같은 서류를 갖추느라 소중한 안전 활동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만, 현장 위주의 예방활동은 독려한다. 하지만 근로자 참여를 통한 예방 활동에는 거의 손을 놓고 있다. 그 흔한 홍보정책조차 찾기 어렵다. 산업안전보건법에는 엄연히 산업안전보건위원회, 명예산업안전감독관과 같은 근로자 참여 제도가 있지만, 일선 산업현장에서 이를 아는 노사는 드물다. 이러니 “회사만 닦달한다”는 경영진의 볼멘소리와 “예방 정책의 선후가 잘못됐다”는 학계의 우려가 나오는 것이다.

노조도 여기에 편승해 회사를 탓하는 기류가 강하다. 직접 안전활동을 하는 데는 인색하다. 한국노총이 2005년 산하 노조의 단체협약을 조사한 결과 안전보건활동을 담은 규정이 있는 곳은 8.5%밖에 안 됐다. 조합원의 생명과 관련된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노조가 그 정도뿐이라는 얘기다.

미 자동차노조, 산업안전기금 자체 조성

선진국 노조는 자율적 산업안전 활동에 적극적이다. 미국 자동차노조는 1984년 작업시간마다 4센트씩 모아 산업안전보건 기금을 조성했다. 이 돈으로 유병학조사, 순방 점검 등을 한다. 노조가 배기가스 시스템이나 인공호흡기를 구매하는가 하면 바닥 코팅 대체물을 물색하기도 한다. 일본 전기장치 노조는 조합원이 허리 통증과 경견완증후군을 호소하자 무게 표시 라벨을 부착하는 등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미국 건설노조는 조합원이 안전수칙을 어기면 일터에서 쫓아낸다. 그린카드제를 도입해 안전교육을 받아야 일할 수 있게 한다. 한국 건설노조는 자기 조합원을 채용하라고 떼를 쓰면서도 고용노동부의 감독관이 안전수칙 위반으로 근로자에게 과태료를 매기려 들면 위력을 행사하기 일쑤다. 안전을 스스로 팽개치는 행태다.

산업안전 관련 법상 근로자의 의무는 사용자와 달리 처벌형이 아니다. 안전조치를 지원하고 보충하는, 협력적 성격의 의무다. 그래서 설령 근로자에게 과실이 있어도 ‘허용된 과실’로서 사용자가 면책되지 않는다. 그만큼 경영진의 책임이 무겁다. 그러나 이런 법률준거형 안전보건으로는 사고 예방을 기대하기 어렵다. 자주대응형 안전보건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프랑스에선 노사가 공동으로 설치하는 산업안전근로조건위원회(CHSCT)가 정기적으로 안전감독을 한다. 정부에 “감독하라”고 압박하지 않는다. 스웨덴도 노사 대표로 꾸려진 안전위원회가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50인 미만 사업장의 안전을 점검한다.

처벌은 못 나눈다. 대신 책임은 나눠 지는 게 순리다. 그 책임에 충실한 건 조합원의 생명을 지키는 노조 본연의 의무이기도 하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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