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중앙일보

[송호근의 세사필담] 출항 고동은 우렁찼는데

입력 2022. 05. 17. 00:39 수정 2022. 05. 17.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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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연단에 선 모습은 낯설었다. YS나 DJ같은 위엄과 경륜이 그리웠다고 할까. 막중한 대업에 곧 적응할 거라는 희망적 사고를 애써 떠올려 우려를 날려 보냈다. 마침 화창한 오월의 햇살에 집단 기대는 한층 부풀었고, 여의도 상공엔 무지갯빛 채운(彩雲)도 떴다. 취임사는 간결했고 명료했다. 게다가 역대 취임사의 단골 개념인 국민과 민족을 잠시 내려놓고 자유시민, 세계시민 같은 지성 담론과 접속한 것은 뜻밖이었다. ‘자유!’를 수십 번 외친 대통령의 출항 고동은 우렁찼다.

딱 거기까지였다. 여의도광장에 운집한 축하객들이 박수로 응했는데 감동의 물결은 아니었다. 맥이 좀 빠졌다. 윤석열정권의 행보를 만천하에 고할 결정적 한 방을 고대했던 필자는 느닷없는 종지부에 당황했다. 안내인을 따르다 길이 뚝 끊어진 듯했다. 그런 심정이었다. ‘진정한 국민의 나라’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다시, 대한민국’은 어떻게 만들 건데? 답은 그냥 ‘자유’였다. 그것도 고전적 사회계약론의 반쪽이거나, 유럽과 선진국에서는 이미 폐기된 1960년대 밀턴 프리드만(M. Friedman) 류의 개념이었다.

「 자유시민 세계시민 언급은 호평
순환논리에 갇혀 현실감 떨어져
취임사는 일차원 에세이가 아닌
정교한 시대 조망 설계도 담아야

‘시장은 자유를 촉진한다!’ 프리드만이 『자본주의와 자유』(1962)에서 힘줘 말했다. 1960년대 국가운영의 주류 케인스주의에 대항하는 시장론자의 반격이었다. 이후 세계는 시장의 폭력에 몸살을 앓았다. 한국이 그렇다. 외환위기(1998)와 금융위기(2008)는 고삐 풀린 자본과 시장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시장은 메뚜기 떼처럼 내려앉아 돈을 먹어 치웠다. 서민들이 길거리로 내몰렸다. 그런데 “자유와 시장은 번영과 풍요를 꽃 피우고…경제성장은 다시 자유를 확대한다”고? 고등학교 교재에 등장한다면 이 순(順)순환적 명제의 진위를 밝히느라 선생은 땀깨나 흘렸을 거다. 대학 강의는 이게 왜 어려운지에서 시작한다.

세상은 그렇게 고상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문재인정권은 시장을 옥죄 수많은 위대한 국민을 익사시켰다. 있는 자의 자유와 시장을 멀리 귀양보낸 역설이었다. 그럼 이걸 거꾸로 뒤집겠다는 얘기인가? 좌우 진자운동? 기실 박정희정권도 저런 원론적 얘기를 자주 했다. 자유, 성장, 풍요가 산업화(또는 과학기술혁신)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 뒤에 숨은 위험은 절대 발설하지 않았다. 시장은 폭력과 자유라는 두 얼굴을 갖는다(janus-faced)는 만고의 진리 말이다. 없는 자에겐 억압, 있는 자에겐 자유다. 이 상극의 드라마, 억압과 자유 사이에 어떤 민주적 연륙교를 놓을 것인지가 정권의 성격과 성패를 가른다.

적어도 좌파정권의 치명적 오류를 치유할 시대의 조감도쯤은 내놔야 했다. 진보 좌파는 윤석열정권의 헛발질을 고대하며 참호에 은신 중이다. 청년기 반항을 떨치지 못한 급진 초선의원들과, 그들의 백병전을 은근히 즐기는 민주당의 불손한 권력자들은 시장을 잘못 건드린 뼈아픈 실책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은 링에 오른 적이 없다’고? 이런 무감각증이 시장과 진정한 자유를 시들게 했다. 자기확신에 대한 정책적 징벌을 고대한 국민적 갈증은 ‘자유와 시장’이라는 지당하고 지루한 수사(修辭) 속으로 증발했다.

취임사는 에세이가 아니다. 되돌이표 순환논법을 왜 그대로 방치했을까. 취임사의 본체가 그렇다. 자유의 가치와 시장경제가 초석, 그 위에 자유시민의 조건(경제적 기초), 도약과 빠른 성장, 과학기술과 혁신, 세계 평화와 연대를 쌓아 올렸는데 그 모두는 다시 ‘자유의 촉진제’라고 했다. 자유가 자유를 낳는다! 자유를 민주와 제대로 결합시키려 공황을 겪고 전쟁을 불사했던 것이 20세기 역사다. 국민들이 묻는다. ‘그건 됐고, 어떻게 할 건데?’ 고립적이거나 상충적인 이 섬들을 연결하는 해법이 정치다. 문명국가들이 골머리를 앓았다. 그게 없으면 그 자체 반지성주의다. 어설픈 논리와 서툰 해법에서 집단 패싸움이 발원했다. 지난 정권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반지성주의를 해체할 ‘영혼의 혁명’은커녕 보수의 정수인 ‘도덕성의 민주화’도 흐릿했다.

세상은 훨씬 무섭고 복잡하다. 대통령의 해법인 계급 ‘연대’와 부르주아 ‘박애’는 산전수전 다 겪은 복지국가에서 겨우 접선했다. 어제 시정연설의 모델인 영국 보수당과 노동당의 협력정치는 그 첫걸음이었다. 세제, 연금, 노동, 교육개혁의 방향은 일단 환영하는데, 110개 국정과제가 나이브한 자유방정식의 함수가 아님을 보여줘야 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미사여구로 편익을 치장하는 정치꾼들이 득실대는 한국 정치에서 정교한 사회설계도를 주문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축하곡 ‘네순 도르마’(Nessun dorma)가 생뚱맞게 들린 이유를 알겠다. 취임사와 동형(同形)이었다. 새벽까지 내 이름을 맞추면 구애를 포기할게, 그러나 모를 걸, 결국 공주는 내 차지, 승리하리라(vincero!). 투지에 찬 칼라프 왕자다운 노래다. 연기(煙氣)처럼 모호한 자유개념과 무중력 원론만으로 국민은 내 것이라는 자만의 전주곡이 아니길 바란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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