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사랑한 주인공과 기록한 감독을 따라..관객도 자연에 매료되다[이길보라의 논픽션의 세계](18)

이길보라 2022. 5. 17.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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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세이블 섬에서 해양생물학자이자 환경 보호 활동가로 홀로 살아온 조이 루커스의 삶과 작업에 대한 철학을 담은 영화 의 포스터.
해양생물학자로서 세이블섬을 오랫동안 기록해온 조이 루커스
섬에 스며들어간 그의 시간을 좇는 영화 ‘고독의 지리학’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일은 수집이자 기록, 아카이빙이며…
대상·감독·관객이 관계를 맺으며 여정을 함께하는 수행적 행위
동시에 작가의 사유와 성찰을 확장해내는 예술적 과정이기도 하다

지리학은 지표상에서 일어나는 자연 및 인문 현상을 지역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과학의 한 분야다. 여기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에서 156㎞ 떨어진 외딴 섬인 세이블섬에서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부분 홀로 지내며 섬에 대한 연구를 이어온 환경보호 활동가인 조이 루커스가 있다. 그는 1970년대 회색바다표범 조사 연구팀의 식사를 준비하는 자원 활동가로 이 섬에 처음 방문한다. 미술학도였던 조이 루커스는 보트나 전세기로만 접근이 가능한 자연 그 자체인 환경에 매료되어 섬의 유일한 주민이 되기로 한다. 영화는 해양생물학자로서 세이블섬을 오랫동안 기록해온 조이 루커스의 시간을 좇는다. 이를 통해 <고독의 지리학(Geographies of Solitude)>이라는 제목에 당도한다.

주인공이 섬과 관계 맺는 방식은 이 영화가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 된다

영화는 화면 속을 가득 메운 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쏟아지는 별들 사이로 섬에 살고 있는 야생마들의 윤곽을 비춘다. 어둠 속에서 말들은 카메라를 응시한다.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조이 루커스가 손전등으로 말의 형체를 살핀다. 그와 카메라는 말없이 섬을 응시한다. 영화는 섬에 살고 있는 야생마, 회색바다표범, 조류, 해양 쓰레기, 지형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해온 조이 루커스의 일상과 기록을 담담히 그려낸다.

세이블섬은 프랑스어로 ‘모래’라는 단어인 saber에서 이름을 따왔다. ‘모래의 섬’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섬의 총 길이는 40㎞에 이르지만 폭이 가장 넓은 곳이 2㎞에 불과하다. 초승달 모양의 모래톱으로 이루어진 섬은 대서양의 독특한 곳에 위치하여 희귀한 동식물이 번식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에 중요 조류 보호구역이자 국립공원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1984년생인 재클린 밀스 감독은 어렸을 때 TV를 통해 이 섬에 혼자 사는 여성 연구자인 조이 루커스를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감독은 어떠한 촬영팀도 없이 무거운 16㎜ 필름 카메라를 들고 섬에 방문한다. 세이블섬과 이곳에서 살아가는 영화 주인공인 조이 루커스와의 관계를 세이블섬만의 방식으로 맺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찍는 행위를 통해 감독이자 촬영자인 재클린 밀스는 스스로 자연 속에서의 고독이라는 환경에 놓이기를 자처한다. 이를 통해 섬의 모래, 사구, 햇빛, 바람, 파도, 말, 새, 딱정벌레와 같은 동식물과 정확하게 관계 맺는다. 영화는 그 관계의 순간을 포착한다.

영화 주인공인 조이 루커스는 섬에 거주하며 연구를 해온 지 40년이 지났어도 매번 새로운 개체를 발견하며 그 순간은 여전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랍다고 고백한다. 영화는 시청각매체라는 미디어를 통해 주인공과 함께 이 섬을 기록하고 수집하기를 시도한다.

조이 루커스는 망원경을 들고 말들이 서식하는 장소 부근에서 각 개체의 모습과 변화, 행동을 기록한다. 말의 분뇨를 분석하여 무엇을 먹었고, 분뇨에는 어떤 회충이 나왔으며, 어느 위치에서 발견된 누구의 분뇨인지 등의 정보를 수집하여 수치화한다. 세이블섬의 야생마들은 한 상인이 말을 길러 본토에서 판매하기 위해 방목한 때부터 섬에 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몇몇 말들이 방치되었고 처음에는 150~250마리였던 야생마 개체 수가 지금은 450~500마리로 늘어났다. 유전적으로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 몇몇 연구가 진행되었고 현재는 노바스코샤주의 공식 말로 지정되었다.

조이 루커스는 말들의 모든 여정을 기록한다. 그러다 말의 사체를 만날 때면 직접 모래를 파 땅속에 파묻는다. 자연스럽게 부식되게 하기 위함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 뼈만 남게 되면 두개골을 연구소로 가져간다. 그렇게 모은 말의 두개골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는 세이블섬의 야생마가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의 관심은 다른 동식물로도 이어진다. 딱정벌레를 채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 아카이빙은 섬에 서식하는 다양한 곤충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행위로 확장된다. 그가 수집한 표본은 박물관으로 보내져 공식적인 역사가 된다.

그의 수집과 기록, 아카이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세이블섬은 세계 최대의 회색바다표범 번식지이기도 하다. 5만마리라는 엄청난 숫자의 회색바다표범이 12월 말부터 2월 초 사이에 섬을 찾는다. 모래바람을 맞으며 새끼를 낳고 먹이를 사냥하면서 개체 수를 보존한다. 조이 루커스는 노트와 펜을 들고 섬 곳곳을 누비며 회색바다표범은 물론이고 이 섬을 오가는 각종 조류를 기록한다. 이는 환경오염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조이 루커스가 22년 동안 수집한 새 300여마리의 사체를 해부한 결과, 72%가 위에 플라스틱이 가득 차 죽은 경우였다고 한다.

그는 동식물뿐 아니라 섬에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크고 작은 쓰레기들을 전부 모은다. 풍선의 링, 헬륨 풍선과 끈, 플라스틱 생수병, 도저히 옮길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전선 쓰레기, 바닷속에서 미세하게 깎이고 깎여 핀셋으로만 잡을 수 있는 작은 크기의 플라스틱까지. 이 모든 쓰레기들을 깨끗이 씻어 말려 보존하고 번호를 매겨 수치화한다. 카메라는 마치 조이 루커스가 섬의 모든 것을 수집하고 기록하듯 인물과 자연을 담담하고 꼼꼼하게 담아낸다. 주인공이 섬과 관계 맺는 방식은 카메라가 대상, 세이블섬과 조이 루커스와 맺는 관계 그 자체가 된다.

생각하는 형식이자 형성하는 생각으로서의 영화, 에세이 영화

이는 영화의 스타일로 승화된다. 감독은 대상을 관찰적으로 촬영하는 방식인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 기법으로 주인공의 행위를 담아낼 뿐만 아니라 자연적 요소를 활용하여 영화를 말 그대로 만들어낸다. 쏟아지는 별빛에 16㎜ 필름을 노출시키고 섬에서 채취한 해초에 필름을 현상한다. 이를 통해 세이블섬의 별빛과 해초라는 자연이 필름으로 영화를 만드는 행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험한다. 이는 작가 자신의 성찰과 사유의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며 작가적 사유와 주관성이 강조된 에세이 영화(Essay Film)로 확장된다. 장뤼크 고다르의 표현대로 “생각하는 형식이자 형성하는 생각으로서의 영화”다.

감독은 세이블섬의 곤충들이 내는 소리를 채집하여 음악으로 만든다. 접촉 마이크에 올라간 곤충의 움직임을 수집하여 패턴화해 음악으로 변환한다. 이는 세이블섬에 사는 다양한 동식물들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소리이자 배경음악이 된다.

대사도 별로 없고 이렇다 할 특별한 소리도 없을 것 같은, 자연 그 자체인 세이블섬을 담은 이 영화는 섬에서 채집한 여러 소리들의 변주로 가득하다. 감독은 사운드 디자인이라는 과정을 통해 자칫하면 지루하게 보일 수 있는 풍광을 새롭게 구축해낸다. 관객으로 하여금 섬의 사구 위에 앉아 바람을 맞다가도 버려진 나무집 안에 앉아 고요히 섬을 바라보는 것 같은 체험을 선사한다.

영화 속에서 감독과 주인공은 그리 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 필름이 45번째로 사용하는 릴이라든지, 어디서 무얼 찍을 것이라든지, 이것이 이번에 가져온 마지막 필름이라든지 하는 말들이다. 섬에 가져온 필름을 모두 사용함으로써 촬영은 끝난다. 감독은 무한대로 찍을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가 아니라 필름카메라를 사용함으로써 제한적인 촬영 환경을 연출한다. 모래바람이 불거나 촬영 장비에 모래가 들어가 고장이 나면 더 이상 촬영할 수 없고 준비한 필름이나 배터리가 떨어지면 촬영을 마쳐야 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감독은 배터리를 품에 안고 걷는다. 그 여정이 영화였다고 감독은 회고한다. 이는 제한된 물자와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조이 루커스의 일상 속 수행과도 같다.

다큐멘터리 영화 <고독의 지리학> 속 조이 루커스의 과거 모습.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대상과의 관계 맺기와 스타일은 영화의 메시지가 된다

주인공이 세이블섬이라는 자연을 대하는 태도, 감독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세이블섬과 주인공을 대하는 태도는 곧 영화의 메시지로 수렴된다. 세이블섬은 저지대의 큰 모래톱으로 형성된 곳이라 해수면 상승에 취약하다. 기후변화로 인해 폭풍의 빈도와 강도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이는 섬을 지속적으로 침식시키는 요소가 된다. 세이블섬은 세기말에는 사라질 것으로 추측된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변화로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섬을 기록하며 환경보호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조이 루커스를 담은 이 영화는 2022년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캐나다 핫독스다큐멘터리영화제 등을 통해 공개되었다. 이달 초에는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 부문에 소개되어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감독은 수상소감에서 이 영화를 집밥처럼 소박하고 편안한 영화라고 소개하며 “환경보호 활동가인 주인공 조이 루커스가 모래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다뤘듯 나 역시 프레임 하나하나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작고 소박한 영화지만 그 어떤 스펙터클한 영화보다 울림이 있는 작품이었다.

정말이지 멋진 작품을 만날 때면 가슴에 손을 얹게 된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내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사회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홀로 살아가며 섬의 변화를 기록하는 행위가 가장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감독은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한 번도 스스로를 정치적인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조이 루커스와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그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처럼 그를 영화 속에 담으며 그 관계성을 보여주는 행위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과 사회의 관계를 성찰하게 한다. 대상과 감독, 관객 간의 관계 맺기가 이루어진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일은 수집이자 기록, 아카이빙이며 대상-감독-관객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여정을 함께하는 수행적 행위가 된다. 동시에 작가 자신의 사유와 성찰을 확장해내는 예술적 과정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이를 마주하는 경험은 조이 루커스의 말처럼 여전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롭다.

■이길보라



영화감독이자 작가이다.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이야기꾼의 선천적 자질이라고 믿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든다. 저서로는 <반짝이는 박수 소리> <우리는 코다입니다>(공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당신을 이어 말한다> 등이 있고, 연출한 영화로는 <로드스쿨러>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기억의 전쟁>이 있다.

이길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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