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공개된 김대중의 직설적인 표현 "자포자기하여 발광 직전까지도.."

장신기 입력 2022. 5. 18.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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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42주년,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김대중의 옥중기록

[장신기 기자]

 1981년 11월 2일 이희호가 김대중을 면회할 때 김대중이 한 말을 정리한 메모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올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2주년이다. 필자는 김대중 연구자로서 광주민주화운동과 직접 연관된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김대중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먼저 광주민주화운동의 발생 배경이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김대중, 문익환 등 민주 인사들을 연행했다. 1979년 12.12쿠데타에 이은 1980년 5.17쿠데타였다. 이와 같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에 광주시민들이 저항하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민주화 운동의 핵심 요구 사항이 '전두환 퇴진', '계엄령 해제', '김대중 석방'이었다.

그다음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광주학살의 진실을 은폐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서 광주민주화운동의 발생이 김대중내란음모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식으로 조작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이 1980년 서울의봄 당시 대규모 시위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후조종하면서 국가변란을 획책했다는 이유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다.

신군부는 김대중이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국적인 소요사태를 일으키려고 했는데 자신들이 5.17 조치를 통해서 이를 막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김대중이 계획한 전국적인 시위의 일환으로 5.18의 단초가 된 전남대 시위가 발생했고 그 이후에 김대중지지 그룹이 악성루머를 퍼트려서 광주에서 참극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조작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김대중은 광주민주화운동과 직접 연결된다. 내란음모조작사건으로 인해 김대중은 1980년 9월 17일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후 무기형으로 감형되었고 1982년 3월 3일에 무기징역형에서 징역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1982년 12월 23일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김대중, 수감생활의 고통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다

김대중은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된 이후인 1981년 1월 31일에 육군교도소에서 청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청주교도소로 이감된 이후인 1981년 2월 11일 처음 부인 이희호 여사와 면회를 했다. 김대중은 면회한 지 10일 뒤인 21일 이희호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 당시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여기 온 지 불과 20일이고 가족 면회한 지 10일인데 벌써 이 모든 것이 반년이나 된 것 같습니다. 그토록 세월이 지루하고 고독이 무섭다는 것을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체험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약해지려는 마음을 신앙의 의지로 격려하며 주님과의 대화와 독서로 이 정신적 시련을 이겨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면회 때 당신의 눈물을 보고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릅니다. 실은 나 자신이 그것을 걱정하여 가족 면회 시 눈물을 보이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느님께 매일 기도했었습니다. 오늘의 여건 아래서 우리가 슬프고 괴로운 인간적인 감정을 어찌 안 가질 수 있겠소?
 
이 편지에서 보듯 김대중은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고난과 수감 생활에서 오는 심신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이희호를 비롯한 가족들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다만 김대중도 표현을 제대로 안 했을 뿐이지, 매우 심한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이는 17일 김대중도서관이 김대중 면회 시 이희호가 정리한 메모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면회 시간은 편지와 함께 김대중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리고 이희호 여사는 허용된 짧은 면회 시간 동안 건강 등 상호 간의 근황을 확인함과 동시에 외부와 차단된 김대중에게 국내외 동향을 알려주었다. 이를 위해서 면회 갈 때 그날 전달할 주요 국내외 현안을 정리한 메모를 준비해갔다. 또한 면회 도중 김대중의 이야기를 정리한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김대중도서관은 이희호 여사로부터 기증받은 사료를 정리하던 중 이와 같은 메모를 발견했다. 이 중에서 1981년 11월 2일 면회할 때 이희호가 김대중의 대화 내용을 메모한 것을 17일 공개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비로서 하는 말이지만 그간 자포자기하여 발광 직전까지도 간 적이 있다. 조남기 목사님께(면회시) 하느님이 왜 나를 살리셨나 원망도 했었다. 내 일생 이토록 치욕스럽고 괴로웠던 적이 없다. 자다가도 숨이 턱 막히며 치밀어올라 못 견딜 지경이면 일어나 기도함으로써 극복하고 했었다. 이제 그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비로서 얘기한다.
  
이희호가 남긴 기록의 역사적 의미
  
이 사료의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 이희호가 수감 중인 김대중을 면회할 때 작성한 자료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이제까지 공개된 자료는 김대중과 이희호가 주고받은 편지였다. 그런 점에서 이 사료는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맞서 여러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김대중-이희호의 의지와 당시 심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둘째, 내용에 관한 것이다. 이 메모의 내용을 보면 김대중이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매우 직설적이면서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김대중은 평생 6년여 동안 수감생활을 했고 그 중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기에 5년 8개월(나머지 4개월은 해방 이후 및 한국전쟁 기간 중) 정도 수감 생활을 했다.

김대중은 수감 중 병고에 시달리고 사형수로서 생사의 위기를 겪는 도중에도 자신의 고통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곤 했었다. 그래서 기존에는 이번에 공개한 사료에서처럼 자신의 고통을 가감 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사료는 김대중의 옥중 기록 중에서 내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특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 현대사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은 전두환 5.17쿠데타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고 광주민주화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동안 이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된 김대중과 사건의 주요 관계자들이 정치인이었다는 이유로 다른 사건에 비해서 학문적인 연구가 부족했다. 그렇게 볼 때 앞으로 이 사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17일 공개된 이희호의 메모처럼 관계된 사료들이 더욱 많이 공개되고 연구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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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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