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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레시피 | 최 부장은 50세의 나이에 왜 공부를 했을까

입력 2022. 05. 20.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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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삶에서 언젠가 기회는 온다. 물론 그 기회는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기회인지 모르고 슬쩍 온 운을 잡은 것’일 수 있다. 야구에서 대타로 나가 홈런을 치거나, 축구에서 종료 직전 투입되어 결승골을 넣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에 대해 단순히 기회가 와서, 운이 좋아서라고 치부하는 것은 그들의 숨어있는 노력과 준비를 폄하하는 것이다.

▶기회는 오는 것이 아닌, 만드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K’의 기세가 거세다. K드라마, K게임, K푸드도 있지만 그중 K의 위력을 가장 강력하게 발휘한 분야는 단연 K팝이다. BTS는 이미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블랙핑크, 엑소, 트와이스, NCT, 몬스터엑스 등등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물론 이들의 화려한 성공 뒤에는 그야말로 ‘피, 땀, 눈물’이 아로새겨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칼군무와 퍼포먼스, 보컬 실력 뒤에는 이미 기업화된 기획사의 철저한 훈련 프로그램 외에 많은 투자와 무대 뒤의 스태프들의 노고가 있음은 당연하다. TV에서 아이돌 그룹의 칼군무를 보면 그들의 연습생 시절이 상상된다. 몇 년을 기약 없이 연습 또 연습을 하며 데뷔하는 꿈을 꾸는 그들은 좌절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1년에 데뷔하는 아이돌 그룹의 수는 거의 100여 팀이라고 한다. 이들은 이미 지망생, 연습생, 데뷔조라는 치열한 관문을 통과했다. 하지만 이 모든 팀이 대중의 기억에 각인되고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이 중에서 데뷔해 히트까지 기록하는 팀은 거의 1, 2팀에 불과하다. 아이돌 양성은 대개 10세 전후로 시작된다. 이들이 바로 아이돌 지망생이다. 그리고 이들 중 선택받은 소수만이 기획사의 연습생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은 매주, 매월 테스트를 거쳐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연습생이 된다. 이때의 나이가 대략 14세 전후이다. 그리고 연습생 신분으로 5년에서 7년간 혹독하고 냉정한 내부 평가를 거쳐 데뷔조에 선발된다. 이 무렵 데뷔조는 7년 정도의 계약을 기획사와 체결한다. 그리고 꿈에 부푼 데뷔. 하지만 여기서의 성공 확률은 10팀 중 1팀에 불과하다. 남은 팀은 1집을 내고 2집까지 낼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이를 수치로 확인해보자. 2016년 미디어업계의 추산에 따르면 아이돌 지망생은 약 100만 명이라고 한다. 이들 중 공식적으로 기획사에 등록된 연습생은 약 1400명이다. 그러니 지망생 중 연습생이 될 확률은 약 0.2%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지망생 중 데뷔조에 들 확률은 0.04%가 되고 드디어 데뷔의 행운을 잡을 확률은 0.013%, 그중 데뷔에서 히트곡을 낼 확률은 0.0013%, 1집을 끝내고 2집 활동이 가능한 확률은 0.00023%라고 한다. 그야말로 대단히 좁은, 거의 불가능한 바늘구멍을 통과한 아이돌을 우리는 TV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예인이 되는 아이돌이 아닌 공부로 비교하면 그 수치는 어떻게 될까. 2020년 대학입시생은 약 51만 명, 이른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인 SKY의 입학 정원은 약 1만 명이다. 이는 수험생 중 SKY에 입학할 확률이 약 2%란 뜻이다. 어찌 보면 아이돌 되는 것보다 ‘공부가 더 쉬웠어요’가 더 맞는 말인 셈이다.

기회의 측면에서 지금 우리 사회는, 이른바 대박, 성공, 출세의 문과 사다리가 점점 좁아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물론 그 좁은 문을 통과하면 대가는 크다. 세계적인 스타가 되고 어린 나이에 주체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 그러기에 모두 다 성공과 대박의 꿈을 꾸고 그것을 향해 질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돌 그룹에 많은 성공 사례가 있듯 실패의 사례도 수없이 많다. 개중에는 실력을 갖추었지만 기획사의 준비 소홀, 운 등도 작용되어 빛을 못 보고 아이돌의 꿈을 접은 수많은 청춘들이 있다. 그들에게 그래도 꿈을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면 성공을 할 수 있다는 위로는 정말 위로 같지 않은 그저 공허한 인사치레일 뿐이다. 10대의 대부분과 20대 초반을 노래, 춤, 연습으로 살아온 그들이 사회에 나갈 수 있는 다른 학습이 되어 있는지 사실은 궁금할 뿐이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이런 예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오늘도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버틴다. 직장인 역시 마찬가지다. 직장생활 또한 아이돌 데뷔와 스타 등극과 같은 과정의 온갖 풍파를 겪게 된다. 그야말로 줄 잘 서서 해마다 승진 척척하고 이른바 꽃보직을 연신 맡으며 ‘꽃길’ 같은 직장생활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력과 성실함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루한 자리를 전전하며 몇 번씩 양복 주머니의 사표를 만지작거리게 되는 것 역시 직장생활이다.

직장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삶에서 기회는 온다. 물론 그 기회는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다. 자세히 설명하면 ‘기회인지 모르고 슬쩍 온 것을 잡는 것’일 수 있다. 야구에서 대타로 나가 홈런을 치거나, 축구에서 종료 직전 투입되어 결승골을 넣는 경우도 왕왕 있다. 홈런을 치거나, 골을 넣은 선수에 대해 단순히 기회가 와서, 운이 좋아서라고 치부하는 것은 그들의 숨어 있는 노력과 준비를 폄하하는 것이다.

감독은 평소에도 선수를 보고, 듣고, 관찰한다. 해서 ‘이번에는 너에게 한 번 맡겨 볼게’라는 확신이 들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오늘, 비록 가진 능력과 자질에 비해 형편없는 직책과 직무를 맡아 홀대받고 있더라도 ‘준비된 자’라면 언젠가 자신의 능력을 펼칠 시간이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짧은 등판의 기회가 왔을 때 단 한 번의 강한 한 방으로 상사의 눈에 들 수 있는 퍼포먼스를 펼쳐야 한다. 이는 실력이다.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실력을 쌓은 일은 당연하고 처신에서도 스스로 ‘변방의 이방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비록 직책과 직무에서 핵심과 중앙이 아니더라도 항상 안테나를 세워 회사나 부서의 전략적인 움직임을 예민하게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단 한 번의 등장 기회에서 회사가 원하는 한 방을 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기회 역시 무산될 수 있다. 너무 긴장해서, 몸이 풀리지 않아서다. 그럼에도 자신이 가진 실력을 후회없이 발휘할 수 있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비록 헛스윙을 하더라도 자신 있게, 그야말로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배트를 돌리고, 골대를 벗어나더라도 강한 슈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상대에게 줄 수 있는 ‘인상의 임팩트’이다.

회사는 학교처럼 장기자랑 시간이 있어 누구에게나 돌아가면서 자신의 개인기를 선보이는 곳이 아니다. 마이크를 탐내는 가수처럼, 달려들어야 하는 곳이다. 준비하자. 몇 년이 걸려도 허송세월이라고 하지 말자. 지금 있는 곳에서 승부를 못 보더라도 그동안 쌓아 놓은 실력으로 다른 곳에서 당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준비된 자에게만 대기만성이라는 기회도 찾아온다.

▶공부는 언제가 됐든 나에 대한 투자

T기업 최 전무의 사례를 보자. 그는 공채로 입사했지만 승진이 유난히 늦었다.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승진 때마다 누락되었고, 동기는 물론이고 후배들에게도 뒤졌다. 50세까지도 부장이었다. 특히 창업주의 뒤를 이은 신임 오너 회장이 취임한 이후 그는 이른바 회사에서 변방을 떠돌았다. 후배들은 그를 부담스러워했고 언제 그만두어도 이상할 것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최 부장은 회사의 미래와 자신을 위해 공부를 계속했다.

그가 특별히 신경 쓰고 공부를 한 분야는 기초소재 분야였다. 하지만 신임 회장은 외부 인재 영입을 통해 기계, 소재 산업에서 금융 산업으로의 구조 전환을 시도했다. 미국에서 공부한 금융전문가들이 영입되어 회사의 주력을 금융회사로 바꾸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고위 임원들은 자연 도태되었다. 기계, 소재 분야는 전문가였어도 금융에서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운일까. 최 부장의 존재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그는 회사의 인적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다 회사에서 큰 일이 벌어졌다. 무리하게 금융지주사를 설립하고 자본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회사의 자금 회전에 문제가 발생한 것. 신임 회장 주재로 매일 회의가 열렸지만 회사의 현금을 조달하는 기계와 기초 소재 파트는 이미 성장 동력이 멈추었고 금융 계열사는 부실 위기 일보 직전이었다. 회사에 비상이 걸렸다. 회장은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팔아 치우려고 했다. 그는 금융사 설립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돈이 될 수 있는 그나마 알짜인 기계와 기초 소재 파트마저 시장에 내놨다. 경쟁 회사는 회사를 헐값으로 인수하려 했고 직원들은 동요했다. 이때 최 부장은 일생일대의 모험을 시도했다. 그는 그동안 공부한 전문 지식과 시장 동향을 파악한 보고서를 작성해 회장에게 전달했다. 회장의 비서실장인 박 이사는 최 부장과는 절친한 2년 후배였다. 박 이사가 보고서를 다 읽고 회장에게 올린 것이다. 보고서는 ‘기계 산업에 기초 소재 산업을 결합하자’는 것으로 ‘이는 시장에서 아직도 매력적인 산업이고 미래에도 확장성이 있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회장은 이 보고서를 보고 최 부장을 불렀다. 최 부장은 이후 일주일간 회장에게 상세한 보고를 했다.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금융 지주사 확장을 일단 멈추고 현금화가 가능한 기계와 기초 소재 산업에 최 부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일본의 기초 소재 분야 한국 수출 금지 조치가 취해졌다. 국가에는 위기가 발생했지만 회사에는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대기업들은 당장 기초 소재 분야의 재고가 없었다. 그들은 백방으로 재고를 찾아다녔고 T기업이 재고가 있으며 생산이 당장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T기업은 오히려 대기업의 투자를 받아 생산 설비를 확장하고 부품을 만들어냈다. 물건을 팔고 대금을 받는 정도가 아닌 선투자, 선금 결재가 이루어질 정도였다. T기업의 현금 유동성 위기는 금방 가라앉고 회사는 알짜 기업이 되었다. 이후 최 부장은 승진가도를 달렸다. 매년 승진해 올해는 전무가 되었다. 그에게 걸맞는 직책과 직급을 찾은 것이다. 회장 역시 최 전무를 신임하기 시작했고 회사의 주력을 기계, 기초 소재 등으로 정하고 지금도 이에 집중하고 있다.

최 전무는 결코 허송세월하지 않았다. 그는 시장 동향을 통해 향후 기초 소재가 각종 전자 및 기계 산업에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나름 6년을 공부한 것이다. 승진이 늦고 변방에서 보낸 세월이 그에게는 오히려 득이 된 것이다. 물론 최 전무의 경우처럼 인생이 딱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최 전무의 공부가 아무 보람과 성과 없이 그저 공부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 전무가 성공을 확신하고 공부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이 공부는 훗날 꼭 T기업은 아닐지라도 다른 곳에서도 빛을 발했을 것이다. 그렇다. 기회는 준비하고, 노력하고, 땀을 흘린 자의 것이다.

▶56세의 늦은 나이에 찾아온 기회

고려 성종 때의 명재상 최승로의 예를 보자. 그는 조선의 건국 틀을 잡은 정도전과 같은 역할을 고려조에서 한 인물이다. 그는 고려 성종에게 ‘시무28조’를 올렸다. 고려는 이를 토대로 정치, 행정, 군사, 지방조직, 법률, 종교 제도를 마련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 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명재상으로서 최승로가 돋보이는 것도 있지만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의미는 따로 있다. 30여 년을 정치와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늦깍이인 56세에 성종을 만나 그의 이상을 마음껏 펼친 점이다.

우리가 최승로에게 주목할 점은 그의 학문적 성취나 재상으로서의 성공적인 역할도 있지만 그의 인생 역정도 있다. 신라의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학문의 성취를 보였지만 그는 20대부터 40대 말까지, 인생의 황금기에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다. 태조 왕건부터 정종, 혜종, 광종, 경종 등 5명 군왕 시절 최승로는 한창 때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관리로서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물론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의 타고난 재주와 능력에 비해 홀대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승로는 이 같은 불편한 현실에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묵묵히 실력을 길렀다. 그리고 50세가 넘어 성종을 만나 그의 이상과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이처럼 오랜 시간 변방과 한직에서도 좌절하지 않은 최승로의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에 고려는 단단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또 최승로는 불교 국가 고려에 유교의 이념과 가치를 실천한 개혁가이다. 그는 오직 공공의 이익, 즉 국가와 백성을 우선한 정책을 펼쳤다. 물론 그가 불교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불교 의식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노력 동원이 모두 백성의 수고와 땀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처럼 최승로는 국가의 안녕와 백성의 평안, 두 가지 기준으로만 정치와 종교에 접근하고 성종을 현군으로 만들었다. 그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어렵고 고단한 처지에도 포기하지 않는 정신, 관리로서 오로지 공적 이익을 추구한 공정하고 정의로운 태도이다.

최승로는 927년 신라 경주에서 태어났다. 당시 후삼국 체제는 무너지고 있었다. 신라는 명목뿐인 국가였다. 최승로의 집안은 6두품. 그의 증조부는 석학 최치원으로 대대로 학문으로는 손꼽히는 가문이었다. 최승로의 아버지는 최은함. 최은함이 중생사의 관음보살에게 기도를 올려 최승로를 낳았다고 한다. 최승로가 태어나자마자 후백제 견훤이 경주로 쳐들어와 경애왕을 잡아 자살을 강요해 죽였다. 전란을 피하기 위해 최은함은 최승로를 안고 중생사를 찾는다. 다시 찾으러 오겠다며 아기를 관음보살상 대좌 밑에 숨겼다. 그리고 보름 후, 중생사를 찾은 최은함은 깜짝 놀랐다. 아기의 얼굴색이 화사했고 입에서는 젖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승로는 출생부터 불교와 큰 인연이 있었다. 최승로는 책을 가까이 했고 학문적 성취도가 무척 빨랐다고 한다. 특히 12세 때 태조 왕건 앞에서 『논어』를 읽어 왕건이 무척 귀여워했다. 당시에는 이른바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이 학계의 주류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최승로는 유학을 가지 않고 오로지 국내에서 공부를 했다. 이런 최승로에게 경륜과 학문을 펼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특히 광종은 중국 출신 관료와 유학파, 과거제도를 통해 발탁한 신진 세력을 중용했다. 이로 인해 최승로와 같은 신라나 후백제 출신 귀족 가문은 승진이나 직책에서 실력에 비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경종의 뒤를 이어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성종은 ‘중앙 부서 5급 이상의 관리는 그 정치와 행정에 관한 제도 개선, 백성을 편안케 하는 정책, 즉 현안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밀봉하여 국왕에게 직접 올리라’고 명했다. 이에 최승로는 ‘오조치적평’과 ‘시무28조’라는 두 가지 국가 정책 방향을 올렸다. 이 중에서 ‘오조치적평’은 대단히 위험한 내용이었다. 오조 즉, 성종의 선대인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의 치적과 고쳐야 할 개선점을 함께 기술한 것. 현재의 권력인 국왕에게 선대 왕의 단점을 지적한다는 것은 사실 왕조시대에서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최승로는 광종에 대해 ‘지방 호족 세력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한 광종의 업적은 인정하지만 쌍기를 비롯한 중국파의 등용으로 편향된 정책과 학문이 퍼졌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대범한 군주 성종은 최승로의 비판을 받아들였다. 또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28조’를 주목했다. 고려의 정치, 행정, 군사, 지방조직, 제도, 문화, 법치 등의 모든 제도를 개선할 시책은 물론 군주의 책무와 도리 그리고 신하의 충성은 물론 군주와 신하의 관계까지 기술한 ‘국가 통치’의 ‘이념서이자 행동강령’이기 때문이다. 성종은 최승로를 정치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이때 최승로의 나이 이미 56세 때이다. 다른 관리들은 은퇴할 늦은 나이였다.

▶누구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된 사회

최승로가 주장한 ‘시무 28조’는 3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국왕은 모범을 보이면서 바른 정치를 행할 것을 강조한 왕도정치, 국력은 물론 백성들의 힘과 재물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던 불교 행사의 축소 그리고 중앙 및 지방 제도의 개혁이었다. 최승로는 ‘군주는 예로서 신하를 대하고 신하는 충성으로 군주를 섬겨야 한다’며 군신간의 예를 통한 화합과 상호 견제 즉 유교에 입각한 군주와 신하의 자리매김을 시도했다. 또한 군주가 백성들을 상대로 일일이 밥 한 그릇씩 나눠주는 것은 큰 정치가 아니라며 한두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보다 모든 백성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제도 개선을 통한 큰 정책을 주문했다.

또 최승로는 올바른 정치를 펴기 위해서는 군주 혼자만이 아닌 신권과의 협의가 필요하며 어느 한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지 않아야 효과를 낸다고 주장했다. 이는 훗날 조선 왕도정치의 통치 이념에도 매우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했다. 또한 최승로는 불교의 폐단과 이을 대체할 수 있는 유교의 확산도 말했다. 당시 불교는 행사에 소요되는 자금 조달에서 많은 부작용을 보였다. 그는 연등회, 팔관회는 물론이고 금과 은으로 불상을 제조하고 불교 제의에 사용되는 조정과 백성들의 과다한 지출을 지적했다. 그는 “불교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군주와 일반 백성이 불교를 대하는 것은 차이가 있어야 한다. 백성들이야 불교 제의를 크게 일으켜도 자신의 재물을 쓰는 것이지만 군주가 불교 제의에 몰두하면 국가와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불교 제의의 화려함에 몰두하는 군주와 왕실에 대한 경계도 빼놓지 않았다.

최승로는 중국식 관제를 도입해 중앙에 2성6부를 두었고 군사기구로는 2군6위 제도를 완비했다. 그리고 지방 조직 개편에도 나섰다.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그 수령으로 군왕이 임명한 목사를 직접 파견해 행정명령 체계를 정비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앙에 국자감을, 지방에는 학교를 지었고 지방 곳곳에 경학박사를 파견해 일반 백성에 대한 교육에도 소홀함이 없게 했다. 물론 이는 모두 유교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펴기 위한 정책이었다.

최승로의 관심은 사회 각 분야에 세세하게 미쳤다. 그는 궁중에 있는 승려들을 내보냈고 사치를 조장하는 큰 저택을 짓는 일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복식을 고려 현실에 맞게 고치고 통일해 복식을 통한 신분제도를 정착시키기도 했다. 물론 최승로의 정책이 모두를 편하게 한 것은 아니다. 노비, 양민, 귀족의 신분제도를 엄격히 하고, 문벌귀족에 대한 예우를 강조한 점은 왕조시대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낸다. 하지만 최승로는 군주와 귀족은 물론이고 일반 서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최승로가 이루고자 했던 고려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 답은 최승로가 신봉한 유교 즉, 공자의 사회발전론에서 찾을 수 있다. 공자는 백성들의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는 사회를 기초적인 사회로, 다음은 백성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마지막은 주나라 문왕이나 주공이 다스리던 사회, 즉 ‘요순시대’의 구현이며 유가의 최종 목표인 대동사회이다. 이 중 최승로는 군신 간의 예의가 있고 가족이 화목하고, 신분이 공고하면서도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예와 법으로 다스려지는 ‘소강사회’를 고려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은 것이다.

성종은 늦은 나이에 발탁되어 열과 성을 다해 군주를 보필하고 백성을 위해 일을 한 최승로를 종1품 문화수시중에 임명한 후, 청하후에 봉하고 식읍 700호를 하사하며 고려의 뼈대를 완성한 노고를 치하했다. 이후 최승로는 고령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지만 성종은 듣지 않았다. 최승로는 989년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성종은 매우 슬퍼하고 그를 태사로 추증했다. 후에 최승로는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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