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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풍성함의 시대

입력 2022. 05. 20.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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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미용실에 다녀온 나를 보고 조카가 말했다.

글쎄, 사자 머리라 하면 1990년대 미스코리아의 전형적인 헤어 스타일이나 또는 80년대 사자 머리로 유명했던 미국 가수 티나 터너 정도 돼야 하는 거 아닌가? 한 번도 내 머리가 사자 머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거늘, 조카 말에 충격받아 돌이켜 생각해 보니 몇 년 전부터 볼륨감이 헤어 스타일링에 주요 과제가 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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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영 CJ ENM CP


어느 날 미용실에 다녀온 나를 보고 조카가 말했다. “엄마, 나도 어른 되면 엄마랑 이모처럼 사자 머리 되는 거야?”

글쎄, 사자 머리라 하면 1990년대 미스코리아의 전형적인 헤어 스타일이나 또는 80년대 사자 머리로 유명했던 미국 가수 티나 터너 정도 돼야 하는 거 아닌가? 한 번도 내 머리가 사자 머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거늘, 조카 말에 충격받아 돌이켜 생각해 보니 몇 년 전부터 볼륨감이 헤어 스타일링에 주요 과제가 되긴 했다. 사실 대부분의 여성 아니 남성까지 포함해 진짜 어른이 되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 풍성해 보이기는 중요한 과제가 된다.

대선 후보 배우자들의 헤어 스타일을 분석한 한 기사에서 정치인·기업가와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여성들이 헤어 볼륨감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것은 조선시대의 가체와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라는 내용이 흥미로웠다. 지위가 높을수록 더 큰 가체를 썼다고 하는데 목 디스크가 와서 고생을 할지언정 풍성해 보이기는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일까.

사실 타고난 경우가 아니라면 나이가 들면서 턱 각도는 무뎌져서 얼굴이 점점 더 커지고, 머릿결은 가늘어지기 마련이다. 거기에 탈모를 부르는 시대적 환경은 더욱더 강력해지고 있다. 집값과 함께 올라가서 내려올 줄 모르는 시대적 스트레스에 산성비와 미세먼지 같은 환경적 요인까지 우리의 소중한 머리카락과 풍성함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한바탕 탈모 공약이 화두에 올랐을 때 화제성을 잡기 위한 의도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실로 진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TV에서 이 뉴스가 끝난 뒤 뒤이어 나오는 광고에서 트렌드 세터였던 지드래곤이 우수에 찬 눈빛으로 탈모 샴푸를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아아! 탈모를 부르는 이 시대에서 풍성함이란 가장 중요한 미의 가치가 됐나!

미친 풍성함을 타고난 지인은 회사에서 가끔 가발 루머에 시달린다고 했다. 심지어 엘리베이터에서 전무님과 단둘이 남겨졌을 때 “나도 가발이야”라는 전무님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그가 말하길 어렸을 때는 어른들이 이마가 좁다고 한마디씩 했단다. “이마가 넓어야 신수가 훤하지.” 맞다, 예전 어른들이 이마 넓은 사람을 보면 신수가 훤하다 했다. 하지만 요즘엔 아무도 하지 않는 말이다

탈모가 중년 남성들의 고민이었던 시대는 이제 갔다. 입시 경쟁에 시달리는 10대도, 취업난에 근심 깊은 20대도, 남녀노소 성별을 초월해 1000만 탈모의 시대라고 한다. 부동산 가격 폭등, 주가 하락, 인플레이션, 가상화폐 폭락…. 매일 우리의 두피를 숨 못 쉬게 옥죄어오는 단어들이 쏟아진다. 이렇게 가다간 내 머리의 풍성함도 내 일상의 풍성함도 모두 지켜내지 못할 것 같다. 이런 환경에선 이 모든 번뇌로부터 잠시라도 두피를 숨쉬게 해줄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코로나를 이기기 위해 잠시 세상이 멈췄던 것처럼 하루에 한 번 10분이라도 그냥 멈춰 보면 어떨까.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에 잠시 ‘멍’하게 있는 것, 이게 요즘 유행하는 ‘불멍’인데 불멍이든 물멍이든 개멍이든, 뭐든 좋아하는 것 앞에 걸음을 멈추고 아주 잠시만 그냥 동작 버튼을 꺼보자. 중요한 포인트는 생각 버튼도 꺼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럴 때는 멍때리고 있을 때 가끔 입을 벌리고 있듯이 입까지 벌리고 멍하게 있어보길 추천한다.

밀려드는 업무의 숨막힘, 걱정의 쓰나미, 그리고 1분1초에 동동거리는 조바심과 대단치도 않은 욕망 때문에 올라간 두피의 열기가 그 입으로 빠져나가면서 조금이나마 뒤엉킨 생각들의 온도를 낮춰줄 것이다. 잠시 좀 바보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이 또한 트렌드이니 나는 탈모 샴푸를 쓰며 불멍을 하는 것만으로 이 시대의 트렌드와 함께하고 있는 것. 아아! 풍성함이여 영원하라!

이선영 CJ ENM 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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