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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엔 사람 홀리는 장이 선다

봉달호 '힘들 땐 참치마요' 저자 입력 2022. 05. 21. 03:01 수정 2022. 05. 2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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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봉달호의 오늘도, 편의점]

경기도 남양주 마석에는 5일에 한 번 장이 열린다. 거기 가판대에서 만두 파는 아줌마는 1인분에 4000원 하는 만두 2인분을 주문하면 이렇게 말한다. “어라, 잔돈이 없는데 만원어치 채우면 안 될까?” 포실한 만두가 탐나, 게다가 3인분 같은 2인분을 준다니, 나는 복권이라도 당첨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가게엔 갈 때마다 잔돈이 없으니, 나중엔 내가 지레 이렇게 말한다. “만 원 줄게, 3인분 주쇼!” 뛰는 장사꾼 위에 날아오르는 손님 있는 법이라네.

일러스트=김영석

트럭에 ‘김씨네’라는 상호를 걸어놓은 것으로 보아 사장님 성씨가 김씨가 분명한 두부 가게 주인장은 3000원어치를 시키면 두부를 한 모 자르곤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많이 담아버렸네. 에라 모르겠다. 다 가져가시오. 손님이 미남이셔서 나도 모르게 많이 담았소. 오늘 운이 참 좋으시네. 맛있게 드시고 부자 되세요….” 언어의 향연이 두부처럼 고소하게 펼쳐진다. 귀가 얇은 나는 기분이 좋아 지갑을 다시 꺼낸다. “여기 도토리묵 주시고요, 저기 청포묵도 주세요.” 몰랑한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내 입맛에도 그 집 도토리묵은 예술이다.

마석 오일장에 왔으니 포장마차를 빼먹을 수 없지. 등갈비로 유명한 맛집에는 항상 줄이 있어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그동안 장 봤던 것들을 테이블 밑에 내려놓고 등갈비 1인분에 막걸리 한 병을 시킨다. 나갈 때 보면 꼼장어 접시가 추가되어 있거나 열무 국수 한 그릇이 바닥을 드러낸 채 놓여 있는데, 도대체 내가 누구랑 함께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불룩 나온 배를 탕탕 두드리며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나물이나 채소는 가장 연세 들어 보이는 할머니가 계시는 곳을 단골로 삼는다. “얼마예요?” “5000원.” 두릅 한 소쿠리를 느릿느릿 봉지에 담는다. “내가 어제 산에서 캔 거여.” “아, 네….” 지난번엔 쑥과 냉이를 캤다 하셨고, 상추도 직접 기른다 하셨고, 고사리도 본인이 캐왔다 하셨으니, 등이 굽은 할머니는 산야(山野)에선 원더우먼이 되시나 보다. 아무튼 이토록 싱싱한 두릅을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 초고추장에 찍어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 입안에 군침이 돈다. 캬, 막걸리나 한 잔 더 해야겠다.

돌아가는 길엔 건어물 판매대를 찾는다. ‘푸른상 건어물’이라는 상호를 달고 있는 이곳엔 시장에서 가장 젊은 장사꾼이 새신랑 모양으로 단정히 앉아 있는데, 말본새는 닳고 닳은 장사꾼들을 찜쪄먹을 정도다. “지난번 아귀포 벌써 다 드셨어요? 글쎄 그게 하루를 넘기면 이상한 거라니까. 맥주랑 함께 먹으면 순삭이에요, 순삭! 이번엔 두 봉지 어떠세요? 여기 문어포는 넉넉히 사가셔서 냉동고에 두고 드시면 되는데.” 그리하여 나는 아귀포 두 봉지랑 문어포 한 봉지를 배낭에 담는다. 어리둥절 3만원이 ‘순삭’했고, 내 주말은 한껏 든든해졌다. 옆집에서 2000원짜리 땅콩 한 봉지도 빼먹지 않는다.

“이거 이거, 찬거리 사오라고 보냈더니 순 안줏감만 골라 왔고만.” 오일장에서 쓸어 담은 것들을 식탁 위에 펼쳐 놓으니 아내가 바가지를 긁기 시작한다. “술 마셨네?” “안 마셨어!” “마스크 벗고 호~ 해봐.” 금세 들킬 거짓말은 왜 했던가. 등에서 짝― 소리가 난다. “함평댁 아줌마네에서 파김치는 사 왔어?” “아니.” “들기름은?” “아니.” 내가 뭔가에 단단히 홀렸던 것이 틀림없다. 오일장에 갈 때마다 영혼이 어딘가로 탈출하고 만다. 등에서 또 짝― 곡성이 난다.

명색이 편의점 주인장인 내가 요새 오일장에 푹 빠졌다. 편의점의 24시간은 검정 바코드가 어딨는지 찾는 일에만 하루 종일 갇혀있는데, 장터에선 사람 냄새가 난다. 처음 마석으로 이사 왔을 때, C업체의 새벽배송이 되지 않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절망에 빠졌다. 그즈음 이웃에게 “오일장에 가보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 부부에게 ‘오일장’이란 단어는 수능시험을 과거시험이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예스럽게 들렸다. 지금은 아내에게 묻는다. “오늘 며칠이야?” “21일.” “장날이 이틀 남았구려, 허허!” 마석 오일장은 끝자리 3, 8일에 열린다.

어떤 주말에는 신도시에 있는 깔끔한 쇼핑센터를 찾아 한 손엔 아메리카노 들고 여유롭게 유모차 끌며 거닐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살아가는 재미가 있다. 얼마 전엔 모처럼 온 가족이 마실 나섰다. 주말이 8일과 겹치는 골든데이를 맞아 장터는 평소보다 흥성였다. 앞마당 무대엔 트로트 가수의 노랫가락이 구수하게 쿵짝거리고, 매캐한 연기 피어오르는 포장마차에 앉아 막걸리 잔을 부딪칠 때 아내가 말했다. “여보, 다음부턴 당신이 애들 봐라. 내가 장 보러 올게.” 인생엔 때로 물러설 수 없는 흥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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