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 2포대로 찐빵 쪘다..그걸로 年630억 만든 '인생 레시피' [e슐랭 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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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 때 메러디스 빅토리호 타고 피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 피란민 1만4500여명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7000t급)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출항했다. 1945년에 건조된 화물선에는 승선정원(60명)의 240배가 탄 상태였다. 당시 레너드 라루 선장이 배에 있던 화물을 모두 버리고 생긴 공간에 사람을 태워 가능했다. 이는 훗날 단 한 번에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사례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당시 피란민 중에는 함경남도 함흥이 고향인 임길순(작고)씨도 있었다. 임씨 일행 등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부산은 이미 전국에서 모여든 피란민으로 넘쳐났다. 빅토리호는 뱃머리를 거제도로 틀었다.
거제에서 6개월 정도 머물던 임씨 가족은 진해로 가서 냉면을 만들어 팔다가 1956년 늦여름 무렵 통일호 열차에 올랐다. “큰 도시에 정착하면 생활이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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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품’ 밀가루로 찐빵 만들어 팔기 시작
그런데 다섯 시간 정도 달리던 열차가 대전역에서 고장으로 멈췄다. 당시만 해도 열차가 한번 고장 나면 언제 다시 달릴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가톨릭 신자이던 임씨 가족은 열차에서 내려 대전역에서 가까운 ‘대흥동 성당’을 찾았다.
당시 신부는 임씨가 흥남부두를 탈출해 대전까지 오게 된 과정을 들은 뒤 미군이 나눠준 밀가루 2포대를 줬다. 대전의 대표 빵집인 ‘성심당’이 시작된 순간이다.
임씨 가족은 이 밀가루로 찐빵을 만들어 대전역 앞에서 팔았다. 밀가루 2포대를 그냥 식량으로 먹고 나면 또 살아갈 일이 막막하다는 생각에 빵 장사를 시작했다. 빵을 만들어 본 적이 없던 임씨는 가장 만들기 쉬운 찐빵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노점 앞에는 나무 팻말로 성심당(聖心堂)이란 간판도 만들어 세웠다. 예수님 마음을 담아 판다는 의미였다. 미군의 구호품인 밀가루가 대전역을 통해 유통되던 시절이어서 재료를 구하기도 쉬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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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300개 만들면 100개 기부…66년의 실천
임씨 가족이 만든 찐빵은 대전시민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앙꼬인 단팥을 듬뿍 넣은 데다 당일 만든 신선한 찐빵만 판매한 게 주효했다. 워낙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이어서 김이 모락모락나는 찐빵은 간식은 물론 식사 대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대전시민 김영숙(77·여)씨는 "대전 사람들에게 성심당 찐빵은 배고프던 시절 허기를 달래주던 추억의 먹을거리였다"며 "늘 신선한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팔아 더 인기를 끌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당시 빵은 선진국인 서양의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장사가 더 잘됐다고 한다.
밀가루 2포대로 사업을 시작한 임씨 가족은 빵 장사를 하면서 이웃과 나눔 정신을 실천했다. 하루에 찐빵 300개를 만들면 100개 정도는 이웃에 나눠 줬을 정도다. 이런 나눔의 마음은 빵 장사를 시작한 지 66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성심당은 임씨가 1997년 작고한 후 아들 영진(66)씨가 2대째 운영하고 있다. 대전역 앞 노점으로 시작된 찐빵 가게는 연간 매출 630억 원의 중견기업으로 컸다. 현재는 직원 698명에 판매하는 빵 제품만 500여 가지에 이른다.
이중 튀김소보루와 부추빵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제품이다. 튀김소보루는 단팥빵·소보루·도넛 등 3가지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4월부터 1년간 대전지역 맛집 검색 순위 1위는 성심당이었다. 이동통신 이용, 신용카드 사용, 내비게이션 검색 등을 분석한 결과 대전의 상징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게 확인됐다. 전쟁 통에 시작된 메러디스 빅토리의 기적이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셈이다.
임씨, 가톨릭 성도 200여명과 北 탈출
성심당은 가톨릭과 유난히 연관이 깊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KTX 편으로 서울역까지 식사용 빵을 날랐다. 임 대표는 “교황이 직접 성심당 빵으로 식사하고 싶다고 해서 대접하게 됐다”고 말했다.
2대 사장인 임 대표는 가톨릭 교회의 사회운동인 '포콜라레(Focolare·벽난로)' 운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기업가가 솔선수범해 이웃돕기에 나서야 한다는 게 이 운동의 골자다. 100% 정직한 납세를 기업가의 기본자세로 삼을 뿐만 아니라 한해 발생하는 기업 이윤의 15%를 직원에게 돌려주는 것을 경영의 원칙으로 삼는다. 요즘도 매월 3000만 원어치의 빵을 사회복지시설 등에 나눠준다.
성심당 창업자인 임씨는 원래 함흥에서 사과농장을 했다. 당시 흥남과 원산 일대는 일제 강점기부터 독일과 프랑스 신부들이 선교를 시작한 곳이었다. 1950년에 성당만 57개가 있었을 정도인데 임씨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북에 들어선 공산 정권은 종교에 배타적이었다. 가톨릭 신자는 초등학교에서도 불이익을 당했다고 한다. 흥남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던 임씨의 장녀 임정숙씨는 "성당에 다니는 애들을 아무리 똑똑해도 발표 기회도 주지 않고 학교 임원도 시켜주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10월 압록강까지 진출한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이 밀려오자 후퇴를 시작했다. 이런 소식이 약 2개월 뒤 임씨가 살던 흥남에도 전해지자 임씨는 피란을 결심했다. 공산정권 치하를 벗어나면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서다. 성당 신도들의 리더격이었던 임씨는 가톨릭 성도 200여 명을 이끌고 피란길에 나섰다.
임씨 일행은 무작정 흥남부두로 향했지만 살을 에는 추위 속에도 부두는 피란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임정숙씨는 “모래알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고 했다.
사람이 많아 배를 탈 수 있을지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때 임씨 가족과 함께 있던 젊은 신부가 아이디어를 냈다. 흰 천에 빨간 십자가를 그린 깃발을 나뭇가지 위에 달았다.
그런 다음 날마다 십자가를 높이 들고 흥남부두에 서 있었다. 어느 날 깃발을 본 미군이 다가와 임씨 가족과 성당 식구를 배에 오르도록 했다. 당시 임씨 등이 탄 그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임영진 대표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대전에서 아버지가 신부님께 식량으로 받은 구호품은 밀가루 2포대가 전부였다”며 “나누는 기업이 성공한다는 말처럼 돈만 보고 왔다면 오늘의 성심당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김방현 기자 kim.ba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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