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발칵 뒤집은 낙태권 시위, 남의 일 아니다 [배정원의 핫한 시대]

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 (보건학 박사) 2022. 5. 22.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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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헌재 판결에도 합법도 불법도 아닌 애매한 상황 놓인 '낙태'..
입법 공백과 정책 부재로 인해 여성들만 고통

(시사저널=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 (보건학 박사))

미국 전역이 낙태권 보장 시위로 연일 시끄럽다. 미국가족연맹, 여성의 행진 등 미국의 여성과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한 시위대는 시카고·뉴욕·로스앤젤레스 등 400여 곳이 넘는 장소에서 시위를 확산해 가고 있다.

일의 시작은 5월2일, 미국 전역에서 낙태를 합법화했던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을 뒤집을 수 있다는 미연방대법원 판결 초안의 유출이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69년 성폭행을 당해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여성이 'Roe'라는 가명을 이용해 텍사스 주정부를 대표한 Wade 검사와 '여성의 낙태권 보장'을 가렸던 재판이며, 여기서 '24주 전 임신중절을 허용한' 판결이 나왔다. 이 판결 이후 미국의 여성들은 원치 않은 임신을 합법적으로 중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청교도 가치에 기반한 미국에서는 현재까지도 낙태권에 대해서는 보수와 진보, 정치와 종교 등 다양한 가치가 얽혀 많은 논란을 야기해온 것이 사실이다.

만약 대법원의 이 초안이 확정되면 낙태권의 존폐 결정을 주정부와 의회가 하게 되는데, 이때 보수 성향의 주정부들이 대거 낙태권 보장을 폐지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시위는 더 격해지고 있다. 실제로 미국 언론들은 향후 미국 50개주 중 절반 이상이 낙태를 금지하거나 극도로 제한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기도 하다. 이를 막아보고자 미국 상원에서는 5월11일 민주당 주도로 낙태권을 보장하는 법안을 표결하려고 시도했지만 공화당의 반대로 표결 자체가 무산되었다.

미국이 '로 대 웨이드'의 판결을 폐기하고 1973년 이전으로 되돌릴 경우 '낙태권 보장 확대'로 가고 있는 세계적인 물결을 거스를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권을 보장한 기존 판결을 파기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5월14일(현지시간) 임신 7개월과 8개월인 두 미국 여성이 워싱턴 연방대법원을 지나면서 낙태 권 폐지에 반대하는 입장을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AP 연합

국회, 낙태죄 대체입법 안 내놓고 있어

우리나라에선 1960~70년대 가족계획의 슬로건이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그리고 그 당시 가족계획은 인구를 억제해 사회가 창출하는 부를 늘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정말 많은 낙태가 피임의 방법으로 시행되었다.

그 후 낙태가 불법화 되면서 임신 과정에 참여한 남성은 빠지고, 임신중지 수술을 받은 여성과 수술을 해준 의사만 처벌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유지되었다. 그러다 보니 의사들은 수술을 피하게 되었고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은 위험한 불법 수술을 받거나, 준비 없이 아기를 낳아 유기하거나 죽이는 비극이 연이어 일어났다.

2017년, 69회 임신중지 수술을 해준 한 산부인과 의사가 "낙태법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고, 2019년 4월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려 낙태죄가 폐지되는 길이 열렸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낙태가 죄가 아니게 되었지만, 이후 국회에서 대체입법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지금은 낙태가 합법도 불법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입법 공백과 정책 부재로 인해 여성들은 최소한의 의료 서비스도 받지 못하고 있다.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들은 여전히 불법 낙태약에 의존하거나, 낙태가 가능한 병원을 찾아다닌다. 임신중지가 가능한 주수도 정해진 바 없어 더욱 위험에 노출되고 있으며, 가이드라인이 없어지면서 임신중지 수술의 경우 부르는 게 값인 게 현실이다.

낙태는 남녀의 성교를 통해 수정된 생명의 출산 전에 임의로 임신을 중단시키는 행위로서, 남녀의 성교가 생식 수단인 인간들에게는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피임에 완벽을 기한다 해도 금욕이 아닌 한 원치 않은 임신은 있어왔고, 고대로부터 임신중지를 위한 많은 방법이 고안되고 시행되었다. 주로 독성을 가진 식물을 으깨거나 반죽해 여성의 질 속에 넣거나, 해로운 음식을 먹거나, 허리띠로 복부를 강하게 조이거나, 심지어 구리바늘이나 옷걸이를 이용해 자궁 속 배아를 꺼내는 등 태아뿐 아니라 임신한 여성의 생명을 위험하게 하는 방법들이 주가 되었다.

미국에서도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이 혼자서 옷걸이 등을 이용해 유산을 하다가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기사들을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신문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는데, 이는 마가렛 생어 여사가 산아제한센터를 만들고 1960년대에 과학자들과 먹는 피임약을 개발하게 되는 강력한 동기가 되기도 했다.

임신은 여성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녀와 섹스를 한 남성의 정자가 있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왜 오롯이 임신이 여성의 일이 되었냐면 임신의 처음인 수정부터 마지막인 출산까지 여성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일을 만든' 남성들이 얼마든지 나 몰라라 해올 수 있었다. 그러면서 원치 않은 임신을 중지하는 일은 당사자인 여성의 생존권·행복권보다 배 속 태아에게 윤리적·종교적인 존엄과 거룩함을 더욱 부여하면서 태아가 우선시되었다.

법으로 금한다고 임신중지 줄지 않아

출산은 원하든 원치 않든 여성의 삶을 바꿔놓는다. 여성은 더 이상 독자적인 개인이 아니라, 몸 밖으로 나오는 순간 한없는 책임을 져야 하는 미약한 존재와 운명공동체로 묶이게 된다. 아이를 한 사람의 어른으로 잘 길러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둘이서도 어려운데, 하물며 사회의 을(乙)이기 쉬운 여성 혼자 아이를 길러야 하는 경우는 가시밭길을 맨발로 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인생이 고달파지는 것이다. 물론 낙태를 반대하는 이들의 말처럼 임신중지를 하지 않으면 훌륭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는 생명이다. 그러나 낙태를 '생명의 존엄을 무시하는 행위'라는 시각으로만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난센스가 아닐까. 또 다른 당사자인 남자들은 모르지만, 낙태를 경험한 모든 여성이 슬픔·우울감·후회·죄책감을 오래도록 안고 살아간다. 실제로 낙태를 경험한 모든 여성은 낙태를 하지 않았다면 '현재' 그녀들의 자녀가 몇 살일지를 다 알고 있다.

무엇보다 낙태를 법으로 금한다고 해서 임신중지가 줄어들지 않는다. 죄로 묶으면 여성들은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여성의 건강권과 생명권, 나아가 행복권은 위협받는다. 낙태를 막는 길은 낙태를 죄로 정해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임신·출산·육아의 책임을 지우는 법적·정책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사회의 미혼모에 대한 시각을 바꾸고 배려를 확대하는 것이다. 또한 생명과 사랑, 성과 피임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저소득층 부부의 출산과 양육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낙태 전 상담제도도 필요하다. 낙태에 대한 모든 논의는 여성과 태아 모두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에서 출발해야 한다.

낙태는 여성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건강권과 행복권이 무엇보다 전제되어야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임을 인정해야 한다. 마가렛 생어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될 것인가, 되지 않을 것인가를 뜻대로 선택하게 되기 전까지는 여성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 (보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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