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최전성기 기운이 담긴 경주 안압지(월지)

2022. 5. 23. 10:5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유경의 문화산책] <44> 안압지의 7세기 입수시설

[김유경 언론인]
경주 월성 대궐에 딸린 연못 월지(月池)(안압지(雁鴨池))는 문무왕 때인 674년 생겨났다.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기운을 담아 토목공사의 장대함과 심오한 조경의 정원까지 갖춘 화려한 못이다. 현대에 복원된 4730평 넓이의 연못은 어느 방향에서도 한눈에 전체가 다 조망되지 않아 여기에 지어진 전각의 명칭은 임해전(臨海殿)이다.

▲ 사진1. 사적 제18호 동궁과 월지 전경 ⓒ김남일

▲ 사진2. 월지(안압지) 배치도와 호안 및 바닥의 단면 ⓒ김남일

효소왕(697), 혜공왕(769), 헌안왕(860), 헌강왕(881) 등이 여기서 봄·가을 신하들과 잔치를 벌였다. 화려한 대궐파티였겠지만, 태평성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신라 말 경순왕은 여기서 고려 태조 왕건을 만나 경애왕이 견훤에게 피살된 일을 전하며 고려에 항복했다.
▲ 사진3. 월지 동궁 건물터의 옛 주춧돌은 따로 모아 놓았다. ⓒ이순희

월지는 그 후 쇠락하고 대궐 터의 초석은 밭이랑에 묻혀 기러기 떼나 내려앉는 쓸쓸한 안압지란 이름으로 천수백 년을 지나왔다. "1975~1980년간 월지는 근처 논에 물을 대는 저수지고 낚시터였습니다. 주변은 모두 뻘 이었지요. 정원 자리엔 나무 하나도 없다가 복원하며 숲을 조성했습니다"고 경주인이자 사적관리 공무원으로 평생 살아온 손수태 씨는 회고한다. 그 후 안압지가 정비되고 못에서 건져낸 마구와 배, 불상, 금동가위 등 3만 점의 유물은 경주인들의 과거 풍요한 생활 내면도 알려주는 것이 되었다.
▲ 왼쪽 사진4. 월지의 굴곡진 호안. 오른쪽 사진5. 월지를 둘러싼 정원은 도교적 분위기를 내는 설계와 조경이다. 못 안에는 3개의 크고 작은 섬이 있다. ⓒ이순희 

태자의 거처인 동궁과 연결된 월지는 동서 약 180m~190m, 남북 약 190m~200m의 길이와 폭을 한 정방형 터가 건축적으로 변형된 형태이다. 이 건축물의 설계는 정교하다. 연못의 서쪽은 직선으로 몇 번 꺾어지게 하여 건축된 5.4m 높이의 축대 위에 못 안으로 돌출되게 위치한 5개 건물에서 못과 정원 전체를 내려다보게 했다. 큰 돌로 괴인 것이 고구려식 건축을 연상시킨다. 동궁 경내에는 전체 26개 건물 군의 자취로 몇 개의 초석이 남아있었다. 건물과 마주 보는 동북쪽은 높이 2.1m에 40여 번의 굴곡을 주어 변화가 심한 호안선을 만들어 조성한 숲정원과 연결된다. 이곳엔 높이 3~6m의 구릉 9개가 못 안에 떠 있는 3개의 섬과 함께 도교적 사상의 무산12봉(巫山十二峰) 풍광을 상징하였다. 이런 미의식과 조경술은 백제의 것이라고 한다.

월지의 돌로 쌓아 만든 호안선 총 길이는 1005m에 달한다. 제일 깊은 데가 1.8m 수심인데 못 바닥은 진흙, 강회다짐에 돌을 깔아 수초가 마구 자라지 않게 하고 연꽃은 아주 부분적으로만 자라게 했다.

복원된 월지에서 입수와 배수시설은 7세기 통일신라의 원래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다. 동남쪽에서 입수되는 물은 작은 폭포가 되어 큰 섬 바로 앞에 소리 내며 떨어졌다가 양쪽으로 갈라져 연못 전체로 퍼진다. 배수시설은 중간 섬이 있는 북쪽에 돌비석처럼 생긴 수문이 건축되어있다.

입수와 배수, 두 시설은 월지가 어떻게 1500여 년을 버텨오면서 경주의 물길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2015년 경주에서 열린 '세계물포럼'에서 김남일 당시 경주 부시장은 '경주 물문화와 미래' 발표 논문에서 입수로와 배수로, 못의 구성을 여러 자료를 총동원해 제시하며 그 가치를 다음의 문장으로 정리했다.

"월지는 우리나라 고대 정원 문화와 물 이용의 정수로 입수와 배수의 과학적 구조와 예술적 조형은 신라인의 물에 대한 이해도가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월지 내의 3개 섬은 삼신사상(三神思想)을 바탕으로 기술적으로는 입수구와 배수구에 배치함으로 물 흐름을 분산시키고 소용돌이 현상을 유도한다. 이로써 협곡 등 특정 지역에 물 고임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전체적 물 흐름을 유지하기 위한 실질적 장치이다."

▲사진6. 월지의 입수시설 개념도 ⓒ김남일
▲ 사진7~9. 월지로 물이 들어오는 부분은 흐르다가 순차적으로 고이고 마지막 순서로는 못으로 소리 내며 떨어지는 폭포가 된다. 7세기 월지 조영 당시의 본 모습이 유일하게 남은 유적으로 용조각 등은 사라졌으나 입수되는 과정에서 불순물이 걸러지는 과정까지가 고려된 설계이다. ⓒ이순희

물이 입수되는 과정은 물길이 안압지 영역 지표면에 처음 나타나는 동남쪽 담장아래에서 약 십수 미터 떨어진 못까지 세 번의 굴곡이 있는 화강암 직선 수로를 따라 물이 흘러들어왔다. 수로를 따라 흘러들어온 물은 신라시대 원형을 부분적으로 지닌 돌쟁반 같은 수구 위에 받쳐진 2단의 석조로 넘어가고 다시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물길을 지나 120cm 높이의 2단 폭포를 이루며 월지로 힘차게 흘러든다. 폭포물이 소리 내며 떨어지는 월지 바닥엔 돌을 깔아 물이 세게 튀어 오르도록 변화를 더하여 조경을 강조했다. 이들 시설에서 674년 안압지 건축 당시의 신라 분위기를 얼마간 느낄 수 있다.

여러 형태로 이뤄진 입수로를 지나는 과정에서 불순물이 걸러지고 물의 속도와 회전, 온도, 산소주입 등 못물을 맑게 유지하기 위한 여러 절차가 진행된다. 수로 바닥에는 자갈과 돌이 깔려있다. 석조에는 원래 용머리 조각이 있어 분수처럼 물을 토해내는 장식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사라져서 물은 그저 지표면 위로 평면적으로만 흘러든다. 1974년 복원 때 입수구와 연결시킨 직선형 화강암 수로는 674년의 변화무쌍한 신라 고대 조각수로와는 확연히 구분되어 보인다.

애초에 월지가 생겨날 때 이렇듯 극적인 형태로 입수 과정이 건축된 것은 단순한 입수 기능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보기 좋게 하여 월지의 물놀이를 즐기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월지의 여러 경관 중 가장 고풍의 신라 분위기를 머금고 있는 수로의 조각은 포석정과 비슷한 인상도 들었지만 여기는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들고 있어 물이 말라버린 포석정과는 다른 생동감을 준다. 이런 화강암 수로 조각 위로 웬 청소년 하나가 줄을 타듯 밟고 다니며 "이거 뭐 시멘트 아이가? 내 눈엔 그렇게 보인다 안 하나" 했다. 사람들이 귀중한 7세기 유물이 모욕당하는 어이없는 광경을 쳐다보았다. 이런 공격에 무방비로 이곳엔 울타리도 없이 공개되어 있다.

비탈진 못 가장자리는 월지 물이 깊숙이 스며들며 흐르도록 유도한 굴곡이 심원한 풍경을 이루고 높낮이가 각각인 구릉을 따라 돌과 나무를 배치한 뛰어난 조경을 알아채게 만든다. 여기는 단순한 연못을 넘어 고풍스러운 철학과 아름다움이 깃든 역사적 장소이다.

월지 숲정원에는 높고 낮은 9개의 언덕마다 검은색을 띤 괴석이 수없이 땅에 박혀있고, 복원 당시 심은 나무들이 30여 년을 자란 그늘아래 수십 번의 굴곡을 이룬 연못가를 따라 산책할 수 있다. 대나무·소나무·버드나무·개나리·모과나무·벚나무, 그리고 관광지를 의식해 여름 내내 피어 있게 한 배롱나무가 많다. 못 한쪽에는 어리연이 피고 월지와는 길하나 떨어진 논에 연꽃이 가득 피었다. 이 논은 월지 경내지만 아직 발굴이 안 된 곳이라 연꽃을 심어두고 보는 중이다. 못에는 잉어·붕어에 사람들이 몰래 넣어버린 외래종도 있다. 못물이 녹조화 되는 걸 막느라고 물고기는 별도 먹이는 주지 않는다. 촛불 심지를 자르는 금동가위며 주사위 같은 독특한 안압지 유물 중 간략한 것들은 이곳에서 전시되지만 불상과 건져 올린 배, 큰 토기, 목간 등 본격적인 유물들은 경주 박물관 안압지관에 가야 한다. 토기는 곡식이 몇 섬 들어감 직하게 큰 것들이 있다.

▲ 사진10. 월지에서 건져올린 토기와 키가 거의 같은 10세 소녀. ⓒ이순희

밤이 되면 월지 야경이 멀리서도 환하게 보인다. 2017년 5월 연휴에는 최고 관객을 기록한 3만 명의 입장객이 들어와 월지의 밤을 즐겼다. 경주시는 2018년 안압지 서쪽으로 붙어있는 연꽃 논과, 북쪽으로는 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릉 사이로 난 동해남부선 철도를 옮겨내고 안압지 경내 영역을 넓힌다고 했다. 안압지 빈터의 주춧돌 자리에 있던 건물 7동과 회랑도 복원한다고 했다.

월지는 궁성에 속한 큰 규모에다 그 건축에 최고의 과학과 예술, 자연과 철학까지 포함했기에 단순한 조경이 아닌 깊이 있는 유적으로 오늘날에도 한국인의 사랑을 받는 장소가 되었다.

[김유경 언론인]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