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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가치를 유지하며 진보를 혁신하는 법..블레어의 성공과 실패에서 교훈 찾아야[경향포럼]

김윤태 고려대 교수 입력 2022. 05. 23. 21:29 수정 2022. 05. 24.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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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 고려대 교수

1994년 41세의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당수가 되면서 시대는 변화했다. 미디어에 비친 블레어의 이미지는 노쇠한 정치인들과 매우 달랐다. “기업을 강조한 대처가 옳았다고 생각한다”는 블레어의 메시지는 충격을 주었다. 블레어는 국유화를 명시한 당헌을 폐지하고, ‘시장과 경쟁의 기업’을 강조했다. 사회주의는 역사적 유물이 됐다.

블레어는 유럽 사회주의 전통보다 미국의 ‘신민주당’ 노선에 관심을 가졌다. 블레어는 ‘신노동당’을 제창하며 공천권의 3분의 1을 장악했던 노조의 권력을 축소하고 ‘1인 1표’ 원칙을 실행했다. 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정당이 아니라 국민 정당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블레어는 사회민주주의를 이탈했다는 비판에 부딪혔다.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블레어를 “바지를 입은 대처”라고 비판했다.

블레어는 “제3의길은 유럽의 사회적 모델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현대화하려는 것”이라 변명했다. 제3의길은 독일의 ‘신중도’, 네덜란드의 ‘폴더 모델’, 북유럽의 ‘노르딕 모델’ 등 다양한 실험으로 확산됐다. 유럽연합 20여개국 중 15개국에서 중도진보 정당이 집권했다. 제3의길은 누진세와 재분배를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에서 크게 벗어났다.

그렇다면 지난 20년 동안 제3의길 정치는 무엇을 남겼는가? 사회주의의 배신자가 되었는가, 아니면 진보정치의 혁신가가 되었는가? 블레어 정부는 경제 호황, 고용 확대, 공공투자의 증가, 아동과 노인 빈곤의 감소, 아일랜드 협상 타결이라는 성과를 이룩했다. 대처 정부에 비해 교육과 복지에 대한 예산을 확대하여 최하층의 생활이 개선됐다. 법인세와 소득세를 인하하여 기업과 중간계급의 지지를 확보했다. 블레어가 선거에서 3번 연속 승리한 비결이다.

그러나 블레어가 집권하는 동안 시장과 기업의 힘이 지나치게 커졌다. 저임금의 서비스직 일자리가 증가하고 노동시장의 이중화가 심화됐다. 금융규제를 방기하면서 2008년 금융위기에 미리 대비하지 못했다. 자유시장과 지구화를 너무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정부의 산업정책과 조세정책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블레어의 결정적 오판은 이라크전쟁이었다. 당시 영국 국민의 80%가 파병에 반대했다. 인기가 추락한 블레어는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의 정치적 쿠데타에 의해 물러나야만 했다.

토니 블레어의 제3의길 정치는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제3의길은 한국 정치에도 영향을 줬다.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를 제시하면서 실업자의 자활과 실업급여의 조건부 수급을 강조했다. 제3의길이 제시한 노동시장 개혁의 영향을 받은 개념이다. 노무현 정부가 성장과 분배의 ‘동반성장’을 강조하고 ‘사회투자국가’를 강조했다는 점도 제3의길과 흡사하다. 하지만 블레어와 마찬가지로 불평등의 지속적 증가를 막지 못했다.

블레어의 제3의길 정치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제3의길이 주장한 시장의 역동성, 경제 성장, 복지 개혁이 무자비한 자본주의 경제의 승자에게만 특혜를 제공했다는 지적은 뼈아픈 비판이다. 영국 노동당은 탈산업화로 노동자계급이 감소하자 고학력·고소득 당원을 대거 받아들이고 선거공학에 빠지면서 약자의 고통에 귀를 닫았다. 결국 분노한 저학력·저소득 노동자들이 브렉시트 투표에서 극우파의 반지구화, 이민 반대, 인종주의에 휩쓸렸다.

제3의길은 자유와 평등, 권리와 책임,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형평성 등 좌파와 우파의 이념적 대립을 넘어 타협을 추구했지만 일관성 있는 정치철학과 경제이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념을 포기하고 실용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보수당과 무엇이 다른지 설명할 수 없었다. 진보정치란 민주주의, 사회정의, 사회적 연대의 가치를 유지하며 혁신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제3의길 정치의 경험은 최근 대선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한국의 민주당과 한국 정치의 미래에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김윤태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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