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만 논설위원이 간다] 13개 시·도서 쓰는 교과서 이름이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윤석만 입력 2022. 5. 24. 00:34 수정 2022. 5. 24.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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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 논란에 빠진 민주시민교육


윤석만 논설위원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진보 교육감이 수장인 13개 시도교육청에서 사용 중인 교과서 명칭이다. 특정 정당이 연상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경기도에서만 900여 학교가 쓰고 있다. ‘민주시민교육’이라는 교과목명도 일반적 표현인 ‘시민교육(Civic Education)’과 달리 ‘민주’란 말이 덧붙는다.

민주시민교육이 제도로 처음 정착된 건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이 2013년 전담부서를 만들면서부터다. 2017년엔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로 채택돼 이듬해 민주시민교육 종합계획이 나왔다. 그사이 김 전 교육감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영입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였고, 초대 교육부 장관이 됐다.

「 김상곤 시작, 문 정부선 국정과제
노조·토지공개념·임대주택 등 옹호
‘홍익인간→민주시민’ 대체 법안도
“진보 교육감의 정치적 도구” 비판

인성교육을 지우려 했던 흔적도 보인다. 2015년 인성교육진흥법 제정 당시 교육부·교육청에 있던 인성교육과가 사라지고 대구시교육청에만 남아 있다. 그 대신 민주시민교육과가 생겨 학생들은 소수자 권리, 보편적 복지,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노조와 파업 등의 주제를 배운다.

시민교육은 첨예한 이슈를 다루기 때문에 편향성을 띠어선 안 된다. 시민교육 모범국가인 독일이 ‘선입견 없는 (사람)’이란 뜻의 ‘운포라인게노멘(unvoreingenommen)’을 교육목표로 삼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시민교육은 편향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제가 되는 교과서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초·중·고용 교과서 4종 나와

초·중·고교용 민주시민교육 교과서 표지. 아래 사진은 중학교 교과서 105쪽에선 상대를 설득해 자기 쪽으로 이동시키면 승리하는 게임을 소개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측으로 2회, 문재인 전 대통령이 북측으로 1회 넘은 사진을 보여주며 누가 이겼는지 묻고 있다. [사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는 초등학교 저·고학년과 중·고등학교 등 4종이 있다. 2020년 재인정을 받아 지난해 3월 발행됐다. 중학교의 경우 ‘민주와 공화의 만남’ ‘더불어 사는 경제’ 등 10개 단원으로 나뉜다. 각 장은 촛불시위, 세월호, 6월 항쟁도 등 대형 사진·그림으로 시작한다.

‘국가의 의무, 안전’ 소단원(36쪽)에서는 인천공항공사의 비정규직 비율(86%)을 소개하며 “이런 노동 환경은 안전 비용을 줄이는 대신 위험 상황이 늘어나게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시설에서 사고가 나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에서 경험했듯 대규모 참사로 이어지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2003년 2월 발생한 대구 참사는 비정규직 이슈와 무관한 고의적 방화 사건이다. 192명이 사망한 비극을 비정규직 이슈와 무리하게 연관 짓는 건 비약이다. 특히 비정규직 비율이 높으면 대구 참사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오도(誤導)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잘못된 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

맥락 없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홍보도 눈에 띈다. 105쪽에선 ‘갈등의 담을 넘어라’라는 놀이를 소개했는데, 마주 선 짝을 설득해 자기 쪽으로 이동시키면 이기는 게 룰이다. 그러고는 2018년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는 문 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사진 3장을 보여주며 ‘누가 이겼는지’ 질문했다. 사진에서 김 위원장은 남측으로 2번, 문 전 대통령은 북측으로 1번 넘어갔다. 전·현직 대통령의 모습이 나온 것도 이 사진이 유일하다.

113쪽에선 비싼 집을 이용해 부자 되고 싶은 사람, 부모로부터 집을 물려받는 사람 등을 거론하며 “집 없는 다수는 언제 원하는 집을 가질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토지는 개인 소유물일까, 공동 소유물일까. 땅·집의 소유자에 대한 권리를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했다.

116쪽에선 주택보급률 100%, 자가보유율 60%의 국내 통계를 보여준 뒤 “독일은 (부동산이) 투기 대상이 되지 않아 안정돼 있다”고 설명하며 임대주택 제도의 장점을 소개했다. 그러나 ‘더 이코노미스트’ 주택가격 통계에 따르면 2015~2020년 주택 상승률은 독일(37%)이 프랑스(14%)·영국(17%)·미국(24%)보다 훨씬 높다.

학부모는 외면, 교사는 무관심

인천 만수북중 박정현 교무부장은 민주시민교육이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교과에서 이미 헌법 가치인 시민 개념을 다루고 있는데, 무리하게 별도 과목으로 만들어 논란이 생긴다”는 것이다. 박 교무부장은 “일부 (전교조만) 선호하고 학부모들은 외면한다”고 했다.

Q : 어떤 혼란이 있나.
A : “지난 정부에서 교육청에 민주시민교육과가 생겼다. 현장에선 교육청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담당 부서를 만든 학교도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 학교 직제와 어긋나 혼란이 많았다. 무슨 지침이 하달돼도 뭘 하라는 건지 업무를 명확하게 알기 어려웠다.”

Q : 교과서의 내용은 어떤가.
A : “혁신학교나 전교조 교사들만 선호한다. 집필진도 대부분 그쪽 사람들이다. 일반 교사와 학부모들은 관심이 없다. 의무와 책임을 함께 가르쳐야 하는데 지나치게 권리만 강조한다. 교과서 내용도 한쪽으로 치우쳤다. (편향적이다 보니)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험할 수 있다.”
교사용 지도서(고교) 188~191쪽을 보면 ‘미디어 기사 분석하기’ 단락에서 학생들에게 비판적 신문읽기 방법을 가르치도록 했다. 예시로 교육감 당선 이후 전망 기사 2건을 분석했는데, 보수 성향의 A신문에 대해선 혹평을, 진보 성향의 B신문에 대해선 좋은 평가를 했다.

A신문 기사에 대해선 “가시화되지 않은 미래를 부정적으로 예측했다. 기자 개인이 예측한 내용이 많아 타당성이 다소 떨어져 보인다”고 했다. 반면 B신문 기사는 “참신한 공약을 객관성이 있게 제시했다. 공약을 근거로 취지와 의도를 타당하게 파악해 의견을 냈다”고 호평했다.

이 같은 편향 논란에 대해 경기도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 주무관 C씨는 “집필진의 판단이라 구체적 답변은 어렵다”며 “교육과정을 개정할 때 다양한 의견을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문 전 대통령 사진만 게재된 것과 관련해선 “집필 당시 현직이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부산시교육감 후보인 하윤수 전 부산교대 총장은 “민주시민교육은 노조를 옹호하고 편향된 통일의식을 주입한다”며 “진보 교육감들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육을 도구화했다”고 비판했다.

왜 하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더불어’ ‘민주’ 표현을 고수하고 인성교육을 지우려 한 것도 논란이다. 교육부 민주시민교육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던 김동석 한국교총 교권본부장은 “인성교육을 보수 정권의 구시대적 유물로 보는 것 같았다”며 “별도의 교사 자격증까지 만들려 하는 등 민주시민교육을 모든 교육과정에 착근시키려 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2018년 1월 교육부는 민주시민교육과를 신설하고, 11월엔 민주시민학교까지 만들어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대한민국 인성교육대상’ 명칭도 ‘인성시민교육대상’으로 바꿨다. 대상위원이었던 한 사립대 교수는 “처음엔 민주시민교육대상으로 개명하려다 반발에 부딪혔다”고 했다.

교육부는 또 2019년 10월~2021년 3월 ‘학교 민주시민교육을 위한 교육과정 총론 개정방안’ 위탁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 보고서는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에서 민주주의로 수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친일교육계 인사들이 주도해 만든 표현”이며 “자민족 중심 개념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지난해 3월 보고서가 공개되자 더불어민주당은 교육기본법에 명시된 ‘홍익인간’을 삭제하고 ‘민주시민’으로 대체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비판 여론에 밀려 철회했다. 교육부 어효진 민주시민교육과장은 “인성교육도 중요하지만 현실적 사회문제 대응엔 경쟁력이 떨어진다. 민주시민교육은 실천 중심의 의미가 강하다”고 했다. 다만, 교과서 명칭에 대해선 “경기도교육청 인정 교과서이기 때문에 교육부와는 상관이 없다”고 해명했다. 경기도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 주무관 C씨는 “더불어민주당 개명(2015년 12월) 이전부터 교과서 이름을 썼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진보 교육감과 문재인 정부가 ‘시민교육’ 앞에 굳이 ‘민주’를 덧붙인 이유는 뭘까. 익명을 요청한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국가주의 교육에 대한 반발과 권위적인 학교 문화 개선이란 취지에서 ‘민주’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특정 진영을 대표하는 표현이 돼버린 것 같다”고 했다.

한국교총 김동석 본부장은 “요즘 학생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는 데는 익숙하지만 책임과 배려는 부족해 인성교육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회의가 10만1214명을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현재보다 강화해야 할 교육 1위는 인성교육(36.3%)이었다.

윤석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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