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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수요동물원] 살육자가 숨어든 그날밤, 홍학새장은 피바다가 됐다

정지섭 기자 입력 2022. 05. 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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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생활 적응한 여우, 홍학우리 들어가 25마리 물어죽여
북극부터 아프리카 사바나까지 살고 있는 여우
'아홉꼬리 구미호'처럼 변화무쌍하게 적응에 성공

봄날의 악몽이었습니다. 봄기운이 완연하게 무르익어가던 이달초 어느 이른 아침. ‘세계의 수도의 동물원’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한 미국 워싱턴DC 스미스소니언 국립동물원 홍학사 사육사는 눈앞에서 펼쳐진 참상에 말을 잃었습니다. 전날밤까지도 사뿐사뿐 우아한 걸음걸이로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을 잃게 하던 조류계의 패션모델 홍학. 그 홍학들이 처참한 주검이 돼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분노와 충격에 휩싸인 사육사의 눈에 이 참상의 강력한 용의자 여우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사건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여우는 재빠르게 자취를 감췄습니다.

미 국립공원관리청이 촬영한 야생의 붉은여우 얼굴. 주변 환경에 따라 조금씩 털빛깔이 바뀐다. 홍학우리 참사와는 관련이 없다. /NPS Photo. Tim Rains

이 참사 현상이 얼마나 참혹했을지는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야생에서 홍학은 육식짐승들이 가장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식사거리입니다. 우아한 걸음걸이에 비해 이륙동작이 신속하지 못한데다 수천 수만마리가 단체로 군집생활을 하다보니 갑작스러운 매복공격에 재빠르게 대처하지 못합니다. 스미스소니언 동물원 홍학사에 터잡고 살던 일흔 네 마리 중 무려 스물 다섯마리가 절명했습니다. 막혀있는 홍학사를 휘뒤집으며 여우는 광란의 살상전을 벌였을 것입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다리는 나뭇가지처럼 뚝 부러지고, 기다란 목은 꺾였을 것입니다. 마른 오징어처럼 북북 찢어지는 살갖에서는 선홍색 피가 콸콸 쏟아였을테지요. 그 우아한 분홍색의 몸뚱어리는 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이번 홍학 학살 참사의 경우 동물원측의 자체 발표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지만, 사건이 얼마나 잔혹하게 전개됐을지는 아래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동영상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코원숭이가 아주 손쉽게 홍학을 사냥해서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는 장면입니다.

리틀록동물원에서 사육중인 붉은여우. 이 종은 구대륙과 신대륙에 골고루 분포해있는 개과 맹수이다. /Little Rock Zoo

홍학들의 혼비백산한 모습은, 여우의 킬러본능을 더욱 자극했을 것입니다. 희생된 홍학 상당수는 식사가 아닌 살육유희에 목숨을 잃었을 공산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야생의 서바이벌 게임에 동정심이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이 광란의 살육전으로 여우는 배를 든든히 채우고, 오랜만에 맹수의 본능욕을 발산했을테죠. 홍학사와 바깥을 이어주는 작은 공만한 구멍이 대재앙의 시작이었습니다. 동물원측은 긴급히 여우덫을 놓고, CCTV를 설치하고, 우리를 개보수하면서 ‘홍학 잃고 홍학사 고치기’에 나섰습니다. 개와 늑대, 딱 중간 사이에 있는 교활함의 대명사 여우가 이렇게 무서운 동물입니다. 세계의 수도라고 불리는 워싱턴 DC 한 복판에서 인간들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끔찍한 살상테러를 벌일 수 있으니까요.우리에겐 아홉꼬리를 가진 전설의 요괴 구미호의 이미지로 익숙해져있습니다. 그런데 여우의 이런 변화무쌍한 기질은 단지 한국의 전설에만 내려오는 얘기가 아니랍니다. 개과 맹수와 고양이과 맹수를 통틀어 여우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지구촌 곳곳에 완벽하게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족속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워싱턴 DC까지 활보를 하면서 인간이 애지중지 키워온 홍학까지 사냥해 먹어치우겠습니까.

주변의 설원에 맞춰서 눈처럼 흰 색의 털을 하고 있는 북극여우 /National Park Service

사자·호랑이·표범·재규어·퓨마 등의 각양각색 맹수가 포진해있는 고양잇과에 비해 조금은 단출하고 소박한 느낌이지만 개과 역시 늑대·재칼·코요테·리카온·여우 등이 포진해있습니다. 개과 맹수의 제왕 늑대는 유라시아와 북미에 폭넓게 분포해있지만, 적도 아래에선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재칼의 영역은 주된 터전인 아프리카에서 중동을 지나 인도와 동남아 쪽에서 끝나지요. 코요테는 북중미의 고유종입니다. 사냥감의 목숨을 끊기도 전에 먹어치우기 시작하는 공포의 식습관으로 악명자자한 리카온은 아프리카의 맹수이고요. 이런 지역의 한계를 여우는 폭넓게 극복합니다. 북극의 맹추위부터 아프리카의 뙤약볕까지 어느 형태의 기온에도 거의 완벽하게 적응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구상에 여우가 살지 않는 곳이라곤 없습니다. 원래 호주대륙에는 여우가 없었는데 19세기에 사냥용으로 들여온 뒤 호주 전역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면서 외래침입종의 대명사가 돼버렸죠. 이 중에 우리가 말하는 여우라고 부르는 종이 바로 ‘붉은 여우’입니다.

여우는 같은 종이라도 살아가는 곳의 환경에 따라 다양한 털빛깔을 한다. 털갈이 중인 어린 북극여우. /미 지질조사국(USGS) 홈페이지

황토색과 붉은색을 뒤섞은 듯한 몸색. 쫑긋 선 귀, 뺨에서 눈을 가로질러 코로 이어지는 선, 그리고 검은 발과 푹신한 꼬리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전형적인 그 여우이고, 한 때 우리나라에서 절멸됐다가 정부 차원에서 복원사업이 진행중인 바로 그 여우입니다. 동토의 시베리아부터 한반도와 일본, 중앙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유럽전역과 북아프리카에 일부까지 터잡고 살고 있습니다. 단일 종이 이렇게 대양을 건너서 구대륙과 신대륙 모두에 서식하는 사례가 몹시 드뭅니다. 공식 명칭은 붉은여우이지만, 이 이름을 무색케하는 다양한 털빛깔을 가진 변종들이 있어요. 그 변화무쌍함이 흑표·백호·킹치타를 능가합니다. 꼬리끝을 빼곤 온몸이 새까만 검은여우, 짙은 회색의 카리스마를 가진 은여우가 있고요. 옅은 털빛깔에 등쪽으로 진한 털무늬가 줄달음치고 있는 신비로운 십자여우가 있습니다. 변신술의 귀재 구미호의 모티브가 바로 여기서 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서식지의 넓이만으로는 붉은여우들이 대장노릇을 하는 것 같지만, 여우는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때로는 여우같지도 않은 생김새로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먹이 활동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큰귀를 가진 사막여우. 북아프리카와 중동에 사는 이 여우는 귀여운 생김새 때문에 애완동물로도 길러진다. /Smithsonian Zoo

여우는 한 종류의 동물이 기후와 지형에 맞게 신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적응의 바로미터는 귀입니다. 살아가는 곳의 기온과 귀의 크기는 비례하거든요. 반면 아주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기온과 몸집은 반비례하는 양상이기도 합니다. 여우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짐승들 중에서도 최북단서식종이라고 할 수 있는 북극여우는 여느 여우들보다 유난히 귀도 짧고, 특유의 주둥이도 짧습니다. 이렇게 모나지 않는 얼굴윤곽은 체온이 쓸데없이 몸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하는 북극여우는 기본적으로 북극곰이 먹다남은 사체나 죽은 동물을 먹는 스캐빈저이지만, 작은 먹잇감은 직접 사냥하기도 합니다. 한겨울 동토에서는 주위 환경따라 완전한 순백의 매혹적인 야수로 변합니다.

중부 및 남부아프리카에 사는 큰귀여우. 사막여우와 닮았지만, 몸색깔이 잿빛이고 덩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다. /Sandiego Zoo

북극권 중에서 상대적으로 기온이 따뜻한 곳에 사는 북극여우 중에서 털빛깔이 푸르스름한 변종 ‘푸른여우’가 나타납니다. 북극여우와 대척점에 있는 종류가 바로 큼지막한 귀를 가진 아프리카 여우들입니다. 중·남부 아프리카에 사는 큰귀여우와 북아프리카 및 아라비아에 사는 사막여우(페네크여우)죠. 이들 두 종류는 얼굴보다 훨씬 커다란 큼지막한 귀를 가졌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귀는 건조하고 뙤약볕인 날씨에 버텨낼 수 있도록 필요이상의 체온을 몸 밖으로 배출해주는 역할을 해줍니다. 또한 자신보다 덩치가 큰 육식동물들이 우글대고 있는 사바나에서 천적의 접근을 재빨리 알아챌 수 있는 안테나 역할을 해주죠. 이 중 페네크여우는 동정심을 자아내는 특유의 앙증맞은 외모 때문에 애완동물로 인기가 있는데, 수요 때문에 불법으로 밀거래되는 수난도 겪고 있죠.

능숙한 나무타기로 유명한 회색여우. 분류학적으로는 너구리에 더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National Park Service

동토와 사막 뿐만 아니라 나무로 우거진 숲에 적응한 여우가 있습니다. 미국부터 개미허리 같은 중남미를 지나 남아메리카 북부까지 서식하고 있는 회색여우입니다. 그 어느 여우종보다도 능숙한 나무타기선수입니다. 곧게 뻗은 나무줄기, 그러니까 90도의 경사도 아랑곳않고 능숙하게 오르내립니다. 겉모습은 여우이지만, 사냥법이나 이동방법, 골격 구조 등은 너구리와 빼닮아서 개과 동물의 진화 과정을 알려주는 살아있는 화석으로도 대접받고 있습니다. 여우들은 기본적으로 맹수이긴 해도 강자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여우에 대한 경멸적 언사라고도 할 수 있는 유명한 사자성어 호가호위(狐假虎威)도 어쩌면 오랜세월 여우의 생태를 인간들이 눈여겨봤기에 만들어졌겠죠. 이들도 천상 먹어야 살고 못먹으면 죽는 생명의 바퀴의 일원일 뿐입니다. 북극여우가 거위의 새끼를 나꿔채 자기 새끼에게 가져다주는 장면을 담은 BBC 어스 동상입니다.

북극여우는 북극곰의 사냥터를 졸졸 쫓아다니고, 사막여우와 큰귀여우는 메뚜기와 작은 설치류를 잡아먹으면서 한편으로 자신들이 더 큰 짐승의 먹잇감이 되는건 아닌지 노심초사합니다. 그런 스캐빈저, 겁쟁이 여우들은 그 어떤 맹수들보다도 지구촌에 넓게 분포하며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이 아닌 도시에서도 완벽하게 적응하면서 자신들이 강자가 되어 사냥하는 법까지 익히고 있습니다. 스미스소니언 동물원의 광란의 홍학살육사건처럼요. 어쩌면 여우는 천천히 그러나 아주 꾸준하게 맹수계의 강자로 진화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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