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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차별금지법을 생각하다

양성희 입력 2022. 05. 25. 00:32 수정 2022. 05. 25.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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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제정 추진 15년만의 첫 공청회
서구 선진국선 '필수적인 법' 인식
인권 앞에 진보·보수 따로 없어 ·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주 국회 앞에서 40일 가깝게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농성을 하던 활동가가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안타까운 일이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부터 7차례나 발의됐으나 찬반양론 속에 국회 논의 한 번 못 거친, 그 자체가 차별의 상징 같은 법안이다. 무엇보다 성소수자 이슈가 발목을 잡았다. ‘차별금지법=동성애 옹호법’이라는 교계의 반대 속에 정치권은 늘 “사회적 합의 부족”을 내세웠다. 법안을 낸 진보 정당조차 의지가 없었다. 지금도 4건의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유엔은 그간 우리나라에 9차례 넘게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다.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연대 및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동조단식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

우선 남녀고용평등법, 장애인차별금지법, 기간제법 등 개별법이 있는데 굳이 따로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인권법)이 필요하냐는 반론이 있다. 과잉입법이라는 얘기인데, 개별법의 사각지대와 차별 구제의 실효성 강화를 위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이주민 성소수자 장애 여성 노인’ 같은 ‘복합차별’이 많아 개별법으로는 한계가 있어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 정도다. 유럽연합도 모든 회원국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한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있긴 하지만 위원회 조직법에 가깝고, 인권위 ‘시정 권고’에는 강제성이 없어 한계가 있다.
차별금지법이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이 있는 서구 선진국들이 우리보다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중요하지만, 차별과 혐오의 자유까지 보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 여론도 우호적이다. 2020년 인권위 조사에서 응답자의 88.5%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했다. 73.6%는 “성소수자도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대표적으로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낸 차별금지법안은 고용ㆍ경제행위ㆍ교육ㆍ정부 서비스 등 4개 공공 영역에서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하며, 사적 영역에서의 차별은 규제하지 않는다. 인권위에 진정하거나,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으며, 피해자에게 보복했을 때에 한해서는 형사처벌도 가능하다. 가령 교회에서 ‘동성애가 죄’라고 설교하거나 사적 대화에서 혐오 표현을 했다고 해서 형사처벌을 받거나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단 차별 입증 책임을 가해자 쪽에 둔 것은 현행 민사소송법 일반 원칙에 어긋난다. 성별ㆍ장애ㆍ나이ㆍ용모 등 신체조건ㆍ종교ㆍ성적 지향ㆍ성별 정체성ㆍ학력ㆍ고용형태 등 21개 차별금지 사유가 너무 많다는 지적도 있다. 유럽연합 기본권 헌장(2000)의 차별금지 사유는 성ㆍ인종ㆍ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ㆍ재산ㆍ성적 지향 등 14개다. 우리와 달리 고용 형태나 학력은 차별금지 사유에 빠져 있다. 기업들이 민감해하는 대목이다.
오늘 국회 법사위에서는 관련 공청회가 열린다. 법 제정 추진 15년 만의 첫 회의다. 국민의힘은 “선거를 겨냥한 민주당의 일방적 공청회 강행”에 반발하고 있어 파행도 예상된다. 사실 지금껏 차별금지법은 진보의 전유물로 인식돼 왔지만, 평등권·인권에 진보·보수가 있을 수 없다. 『왜 차별금지법인가』의 이주민 변호사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적극성이 부족한 큰 이유로 “평등주의가 진보주의자의 전유물로서,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은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는 오해”를 꼽았다. “정부의 권한과 역할을 제한하기 위해서 침범할 수 없는 개인의 기본권을 법으로 철저하게 보장하는 것이 보수주의의 핵심가치라면, 차별금지법은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도 꼭 필요한 법”이라고 강조했다. 이제는 수권 정당이 된 국민의힘도 전향적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소수자 인권 보호가 다수의 인권 침해가 아니듯 차별금지법은 소수자뿐 아니라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 차별을 모르고 살았더라도 어느 순간 장애인이 될 수 있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면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경험할 수 있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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