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있어도 버스 못 타".. 현금 없는 버스에 소외되는 노인들

최효정 기자 2022. 5. 25.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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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버스 현금 이용률 0.7%.. 서울시, 현금없는 버스 노선 18개 확대
디지털 기기 익숙치 않은 고령층은 '막막'

지난 24일 오후 8시 30분 서울 영등포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660번 시내버스에 탑승한 이모(73)씨는 동전지갑에서 동전을 꺼내다가 현금통이 없는 것을 보고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운전기사가 “이 버스는 현금을 받지 않는다”고 안내하자 이씨는 난감한 모습이었다. 운전기사가 휴대폰으로 요금을 계좌이체할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이씨는 “그런 거 할 줄 모른다. 현금받는 버스를 타고 가겠다”며 버스에서 내렸다. 강원도 강릉에서 서울에 온 그는 딸을 보러가기 위해 무작정 딸이 알려준 번호의 버스에 탑승했다고 했다.

이씨는 “딸이 교통카드 쓰라고 금액도 넣어주고 하긴 했는데 맨날 밖에 나올 때면 카드를 놓고 나온다”며 “아까 휴대폰으로 계좌이체하라고 설명해주던데 잘 모른다. 매번 자식들이 해주거나 은행에 가니까”라고 말한 뒤 딸에게 다른 버스는 없는지 물어보려 전화를 걸었다.

서울시가 올해부터 ‘현금 없는 버스’ 노선을 18개로 확대하면서 카드 사용에 어려움을 느끼는 고령층이 버스에 탑승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카드로 버스 요금을 내지 못할 경우 휴대폰 앱으로 계좌이체가 가능하지만 휴대폰 사용에 익숙치 않은 고령자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25일 서울시 등에 따르면 서울시는 올해부터 버스 내 현금 요금함을 없애고 교통카드 이용만 가능한 ‘현금 없는 버스’ 노선을 18개(버스 418대)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현금 없는 버스’는 지난해 10월부터 8개 노선(버스 171대)에서 시작한 시범사업이다. 시범사업기간은 오는 6월까지다.

서울시가 ‘현금 없는 버스’ 사업을 시행하는 것은 시내버스 내 현금 이용률이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는 판단에서다. 서울시 버스정책팀이 제공한 통계에 따르면 서울 시내버스의 현금 이용 승객 비율은 2010년 5%에서 2020년 0.8%까지 감소했다. 지난해에는 더 감소해 0.7%로 집계됐다. 서울 시내버스 현금 수입은 109억원에 불과했지만, 유지·관리비용은 20억원에 달했다. 낮은 이용률에 비해 현금 요금함 유지를 위한 관리 비용이 높다 보니 버스에서 현금함을 없애려는 것이다.

'현금없는 버스' 시범 운영 중인 버스 앞 모습/조선DB

하지만 버스에서 현금통이 사라지면서 카드 사용이 서툰 노인들이 발길을 돌려야 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현금을 내려고 준비해 버스를 탔다가 ‘현금없는 버스’라고 고지를 받은 다음에는 요금을 낼 방법이 없어 내린 뒤 다른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디지털 디바이드(정보 격차)’ 현상이 대중교통에서조차 노인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1년 지급수단 및 모바일금융서비스 이용행태 조사결과에 따르면 70대 이상 노인의 최근 1개월내 현금 이용률은 98.8%였고, 신용카드 이용률은 57.3%에 불과했다. 체크·직불카드 이용률은 34.1%, 모바일 카드는 1.3%로 극히 낮다. 노인 절반 가까이가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데다 휴대폰 지급수단으로 이를 대체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영등포구 주민 염모(68)씨는 “버스정류장 전광판에 집 가는 버스 번호가 뜨니까 놓칠까봐 타서 현금으로 내려고 하니까 안 된다고 했다”며 “나중에 내리고 보니까 전광판이나 옆면에 ‘현금없는 버스’라고 써 있었는데 전광판 알림에는 번호만 뜨니까”라고 말했다. 이날 염씨는 현금없는 버스를 타는 바람에 한 차례 버스를 보내고 15분 후에 오는 다른 번호 버스를 타야만 했다.

서울시는 ‘현금없는 버스’로 인한 불편·부작용이 없도록 대비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버스정류소 200m 반경 내에 편의점이나 가판대, 지하철 역사를 안내해, 교통카드를 구매하거나 충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버스정류장에 들어오는 버스가 ‘현금없는 버스’인지 알 수 있도록 번호 옆 LED로 승객이 알 수 있도록 하거나 버스 내부에 ‘현금없는 버스’를 알리는 음성을 정류장에 멈출 때마다 방송하고 있다”면서 “‘현금없는 버스’가 지나다니는 정류소마다 큐알(QR)코드를 부착해 모바일 교통카드를 쓸 수 있도록 하거나 버스에 탄 카드 미소지 버스탑승객을 위해 계좌이체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울시의 대응은 카드와 휴대폰 사용에 미숙한 고령층의 불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QR이나 휴대폰을 이용한 계좌이체 활용 등은 노인들에게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현금없는 버스’가 ‘현금사용선택권’에 배치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현금사용선택권은 소비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지급결제수단 선택 시 현금을 배제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는 유럽을 중심으로 등장한 개념으로 영국 등 서구 선진국들이 2000년대 들어 ‘현금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노인 소외 등 부작용에 직면하면서 생겨난 개념이다.

특히 ‘현금없는 사회’의 선두주자였던 스웨덴은 2030년까지 ‘현금없는 사회’ 완전 이행을 목표로 했지만 부작용에 직면하며 은행 등에서 현금사용을 의무화하고 있다. 디지털이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을 비롯해 은행계좌가 없는 저소득층·난민들이 불편을 겪었기 때문이다. 현금자동인출기가 사라진 소도시에서는 기차나 버스를 타고 대도시까지 다녀와야 하는 등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수범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현금없는 버스’ 노선 시범 운영이 곧 버스 이용시 현금 전면 폐지를 위한 전초전이라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면서 “고령층들이 버스 이용에서 지장이 없도록 정부 차원에서 해결책을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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