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중앙일보

[시조가 있는 아침] (125) 웃을대로 웃어라

입력 2022. 05. 26. 00:16 수정 2022. 05. 26.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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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웃을대로 웃어라
효종(1619∼1659)

청강(淸江)에 비 듣는 소리 긔 무엇이 우습관데
만산(滿山) 홍록(紅綠)이 휘두르며 웃는고야
두어라 춘풍(春風)이 몇날이리 웃을대로 웃어라
-병와가곡집

전쟁과 시의 응전력

‘맑은 강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그 무엇이 우습다고/ 산에 가득한 꽃과 풀들이 휘두르면서 웃는구나/ 두어라, 봄바람이 이제 며칠이나 남았으리 웃고 싶은 대로 웃어라.’

5월을 보내며,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시조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병자국치 후 소현세자와 함께 청(淸)에 볼모로 잡혀가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당시에 읊은 것으로 추정된다. 자기가 청나라에 끌려가는 것은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는 정도의 소란스러움인데 그것을 보며 온산의 꽃과 풀들이 몸을 휘두르며 웃는다는 것이다. 이때 만산홍록은 청군에 비유된다. 봄바람이 며칠이나 가겠는가? 웃을 대로 웃어보라는 강한 복수 의지가 나타난다.

봉림대군은 9년간 온갖 고초를 겪고 돌아와, 형의 돌연한 죽음으로 아버지 인조에 이어 조선의 제17대 왕에 올랐다. 즉위 이후 송시열과 이완 등을 기용해 북벌을 준비했으나 재위 10년 만에 붕어하여 수포로 돌아갔다. 이런 상황은 현대라 해서 다르지 않다.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한 우크라이나 시인 타라스 셰우첸코의 ‘유언’이나, 6·25 때 시인들의 숱한 항전시들이 시의 응전력을 보여주고 있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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