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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심청을 '효녀'라 부르나..연극 '심청전을 짓다'[플랫]

플랫팀 기자 입력 2022. 05. 26. 13:40 수정 2022. 05. 2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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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미상의 고전소설인 심청전은 230여종이나 되는 이본(異本)이 존재할 정도로 오랜 세월 꾸준히 개작돼 왔다. 춘향전·장화홍련전과 함께 고전소설 중에서도 여성 인물이 전면에 등장하는 대표적 여성 서사로 꼽히지만, 소설 속 ‘효녀 심청’은 어디까지나 유교적 가부장제의 요구에 부응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아버지 심봉사의 허황된 약속에 인신매매의 피해자가 된 심청을 그저 ‘효녀’라고만 불러도 될까. ‘효’를 명분으로 심청의 희생을 미화하는 것은 누구의 기획일까. 지난 19일 막을 올린 극단 ‘모시는 사람들’의 연극 <심청전을 짓다>(김정숙 작· 권호성 연출)는 수없이 변주되어온 심청의 이야기를 주변인의 시선으로 비틀어본다.

제43회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으로 지난 19일 막을 올린 연극 <심청전을 짓다>의 한 장면. 극단 모시는사람들 제공



무대는 심청이 살았던 도화동 마을의 성황당이다. 인당수에 빠져 죽은 심청의 제삿날, 심청의 이웃 ‘귀덕이’ 모녀와 남경상인은 성황당에 제상을 차린다. 마을엔 시종일관 폭우가 쏟아지고, 성황당엔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우연히 성황당에 모인 이들이 귀덕이네로부터 심청의 사연을 듣고 죽은 심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극의 큰 줄기다.

심청전에 대한 연극이지만 심청은 무대에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성황당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삶과 죽음이 재해석된다. 연극 속 ‘양반 나리’에게 심청의 죽음은 만고에 길이 빛날 효심이지만, ‘수절 과부’에게는 세상이 강요한 죽음일 뿐이다. 과부는 혼례 직전 죽은, 얼굴도 보지 못한 남편과 혼인을 했고 이제 그 자신도 죽음을 통해 ‘가문의 영광’인 ‘열녀’가 될 것을 강요받고 있다. 충격으로 실성한 과부는 이곳에서 심청의 혼을 본다. 심청은 과부의 입을 빌어, 이 ‘죽음의 공모자’들을 직격한다.

각자가 처한 상황, 신분, 성별도 다른 성황당의 사람들 앞에는 이제 또 하나의 선택이 놓였다. 누군가의 죽음을 뒤늦게 기억하는 것을 넘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관습과 허울을 넘어 이들은 또 다른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심청의 이웃들은 새로운 심청전을 지어나가기 시작한다.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연극이다. 연극은 죽은 심청을 진혼하면서 각자 다른 처지의 인물들이 대립이 아닌 화합으로 또 다른 삶을 구하고 응원하는 희망적인 결말로 나아간다. 다만 심청전이란 문제적 텍스트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개작되는 양상에 비춰봤을 때, 심청의 ‘선한 이웃’들의 뒤늦은 고해와 반성이 주가 되는 전개는 다소 단순하게 느껴진다.



조명과 음향으로 마을에 쏟아지는 폭우를 실감나게 구현했고, 극적 전환이 있을 때마다 깔리는 거문고 연주도 극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올해로 창단 33주년을 맞은 중견극단 ‘모시는 사람들’이 2015년 여성극작가전에서 초연한 연극이다. 지난달 말 시작된 제43회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작으로 선정됐다. 공연은 서울 대학로 알과핵 소극장에서 28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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