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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칼럼] MBTI 라는 감옥

김보라 입력 2022. 05. 28. 00:11 수정 2022. 05. 2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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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고민'하는 MZ세대
코로나에 MBTI 테스트 열풍
기업 마케팅 이어 채용에도 적용
MBTI 진실에 부합할지는 의문
사회적 편견·차별 정당화할 수도
일상의 대화·소통이 훨씬 중요
김보라 문화부 차장

몇 번을 되풀이해도 똑같았다. 나는 ENFP다. 이젠 좀 지겨워진 MBTI 테스트 얘기다. ENFP로 말할 것 같으면 ‘재기발랄한 활동가’다.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이자 분위기 메이커이자 사랑과 꿈과 삶이라는 모험을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될 준비가 돼 있는 자’다. 가만, 내가 그랬던가. 눈치가 좀 빠르고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다는 건 인정. 문제는 MBTI의 대유행으로 ENFP라는 게 알려지며 사람들을 만날 때 은근히 불편해졌다. 여럿 모인 자리에서 10초 이상 침묵이 흐르면 다들 내 눈만 보는 것 같고, 혹여 꽉 막힌 말을 한 건 아닐까 자기검열도 심해졌다. 가까웠던 후배가 (ENFP와는 상극이라는) ISTJ인 게 밝혀지기라도 하는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MBTI는 성격 유형의 한 검사다. 외향형(E)과 내향형(I), 감각형(S)과 직관형(N), 사고형(T)과 감정형(F), 판단형(J)과 인식형(P) 등 네 가지 분류 기준을 조합해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칼 융의 심리 유형론을 근거로 1944년 미국에서 작가 캐서린 쿡 브릭스와 딸 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가 고안했다. 사실 MBTI는 전쟁이 만들어낸 지표다. 2차 세계대전 징병제로 인한 인력 부족으로 여성들이 산업계에 대거 진출해야 했고, 성격 유형에 따라 적합한 직무를 찾도록 할 목적으로 쓰였다. MBTI와 같은 이른바 ‘레이블링 게임’은 자기 정체성을 특정 유형으로 딱지 붙인 뒤 이 유형에 맞는 삶의 방식을 추종하고 동조한다. 상황에 따라 ‘난 ××이니까’ ‘난 ××라서’ 같은 명분과 핑계를 동시에 준다는 얘기다.

코로나19로 사회적 접촉이 줄면서 MBTI 테스트는 크게 유행했다. 고립 상태가 지속되며 실존적 불안감이 커진 탓이다. 타자와의 관계, 남들의 평판 속에 사회적 진화를 거듭해온 우리는 나를 확인하고 이를 공유하려는 심리가 극대화됐다. 소통 기회가 줄자 MZ세대(밀레니얼+Z세대)들은 60년 전 전쟁통에 개발된 MBTI를 소환했다. 소개팅에 앞서 MBTI를 물어 나와 맞는 사람인지 파악하고, 진지하게 궁합을 본다는 얘기도 이제 놀랍지 않다.

심심풀이 게임 정도였던 MBTI는 마케팅 도구를 넘어 새로운 유리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유형별로 입어야 할 옷이 출시되더니 주식 투자 상품에도 16가지 유형별 추천이 생겨났다. 급기야 기업들은 채용의 도구로도 쓴단다. ‘자신의 MBTI 유형을 밝힌 뒤 희망 직무를 연관 지어 설명하시오’ 등의 항목이 등장했다. 안 그래도 불안한 취업준비생 사이에선 어느 기업이 특정 유형을 우대한다거나, 특정 유형은 어느 기업엔 절대 못 간다는 식의 ‘신종 족보’까지 등장했다. 더 재밌는 일도 있다. CJ대한통운은 최근 “대표와 임원들이 MZ세대와 소통하기 위해 팀장급 이상 전원이 MBTI 검사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회사는 이 결과에 기반해 임원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고 소통 방식을 개선할 ‘코칭북’도 지급했다.

이쯤 되면 MBTI는 차라리 감옥이다. 사회지도층은 부하에게 업무 지시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할 테고, 사회 초년생들은 테스트 한번 잘못 했다가 자기가 원하는 분야에서 일할 기회를 영영 빼앗길 수도 있다. MBTI는 그렇게 편견과 차별을 정당화시키는 ‘사회적 구분 짓기의 도구’로 전락하는 중이다.

웃자고 시작한 MBTI가 다큐가 됐다. MBTI를 주관하는 마이어스-브릭스재단마저 “채용 과정에서 지원자들을 걸러내는 장치로 사용되는 것은 비윤리적이며 불법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MBTI와 빅5 등 성격 테스트로 직원을 뽑는 미국 기업들을 경계한 발언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16가지 틀 안에 가두기엔 복잡한 함수다. 스티브 잡스, 에릭 슈밋, 제프 베이조스 등의 경영 스승이자 실리콘밸리의 위대한 코치로 불리는 빌 캠벨은 각종 테스트와 지표엔 관심이 없었다. 대신 ‘사회정서적 소통’을 조직 문화의 핵심으로 여겼다. 직원의 가족이 뭘 하는지, 아이들이 몇 살인지 꿰고 있었다. 팀원들이 주말에 뭘 했는지, 휴가지의 풍경은 어땠는지를 물으며 회의를 주도했다. ‘워라밸’을 핑계로 우리가 병적으로 여기는 직장에서의 말들이 전설적 리더십 코치의 성공법이었다니.

MBTI의 현실 침투가 무서운 건 우리가 타인에 대해 알아가는 그 아름다운 시간을 더 이상 갈망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타인에 대한 질문을 게을리한다는 데 있다. MBTI가 말해주지 않는 또 하나의 진실. 세상은 복잡하고, 우리 내면은 그 세상을 여러 겹 접어놓은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오해하지 마시라. ENFP도 때로 우울하고, 큰 과제 앞에선 어김없이 망설인다. ISTJ 친구들과도 무사히 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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