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항해 덕분에 탄생했네, 범선 타고 나르던 '쓴맛'

한은형 소설가 입력 2022. 5. 28. 03:05 수정 2022. 9. 2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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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인디아 페일 에일

‘올드 스파이스’라는 남성 화장품이 있었다. 불투명한 우유색 유리병에 범선이 그려져 있는 이 물건은 세상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나 궁금한 것은 많았던 한국의 한 초등학생을 현혹시켰다. 1980년대의 일이다. 뭔가 광고 카피도 상당히 야심 찼다. 지금 찾아보니 “야망과 도전의 전통 향취-올드 스파이스”, 이게 메인 카피다. 이런 문장도 함께 있다. “그 향취에는 전통의 중후함과 진보의 위대함이 살아 있습니다.” 아… 내 마음이 다 웅장해진다.

아이피에이를 마시다가 생각했다. 이 맥주는 범선을 타고 인도에 도달했겠구나라고. 올드 스파이스 병에 새겨진 그런 범선을 타고 말이다. IPA, 인디아 페일 에일(India Pale Ale)이란 뜻의 이 맥주는 영국에서 만들어져 인도로 갔다. 동인도회사에서 일하는 인도의 영국인들은 고국의 맥주를 그리워했고, 당시 인도에서는 영국인들을 만족시킬 만한 맥주를 생산하지 못했고, 그래서 영국에서 가져왔던 것이다. 긴 항해를 거쳐 말이다.

영국 풀러스 인디아 페일 에일(IPA) 맥주.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곳인 적도도 두 번 지난다. 대서양을 지나 아프리카의 최남단 희망봉으로 내려갈 때 한 번, 다시 위로 올라와 인도양을 지나 인도로 갈 때 또 한 번. 십 개월 정도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상했다. 십 개월의 항해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변질되지 말아야 했다. 조지 호지슨이란 영국의 맥주 제조자의 비책은 알코올 도수를 높이고, 홉(hop)을 넣는 것이었다. 홉에는 방부 효과가 있다. 세고, 쓴 맥주가 만들어졌다. 과연 긴 항해에도 끄떡없었다.

영국의 특정한 맥주 스타일을 가리키는 말인 ‘에일’에 ‘인디아’와 ‘페일’을 붙여 ‘인디아 페일 에일’이 되었다. ‘페일’은 ‘창백한’이라는 그 뜻이 맞다. 색이 정말 창백하기보다는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맥주인 색이 짙은 포터와 차별화하기 위함이었다고. 이걸 모르고 나는 아이피에이를 시켰다. 바로 이 ‘페일’이 문제였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 ‘페일 블루 아이즈’를 떠올리며 ‘색이 옅으면 도수가 낮겠지’라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나의 예측은 맞지 않았다. 도수가 약하지도, 색이 옅지도 않았다.

뭘 몰랐던 시절이다. 초두효과라고 해야 하나. 아이피에이의 피가 ‘페일’의 약어라는 것만 강하게 박혀 ‘약한 맥주’라며 아이피에이를 시켰다. 그러고는 ‘아, 이 맥주 썼지’라고 후회하는 일을 반복했다. 독하고, 썼다.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유형의 맥주였다. 나는 맥주에 약한 편이고, 도수가 높은 맥주는 더 힘들다. 눈앞에 아이피에이를 두고 생각했다. 왜 옅지도 않은데 ‘페일’이라고 하는 거지? 바이젠은 물론 필스너보다도 색이 진한 이 맥주를 몇 모금 마시다 말았다.

어쩌면 ‘페일’이라는 단어에 약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인디아 페일 에일의 페일이 내가 아는 그 페일과는 다른 맥락에서 쓰였다는 것을 알고도 ‘인디아 페일 에일은 독하고 쓴 맥주’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래 걸렸다. 인디아 페일 에일을 시키고, 마시고, 시키고, 마시고 했다. 그러다 좋아하게 되었다. 이마를 찌푸리게 하던 쓴맛을 어느 순간 이해하게 되었달까. 쓴맛 안의 에스테르라고 해야 하나. 오렌지 껍질, 캐러멜, 견과류, 나뭇진 같은 걸 느끼게 되었다. 아마도 체화의 과정이라고 해야겠다.

거의 십 년이 걸렸다. 아이피에이를 마시기 시작한 것도 십 년,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쳐 좋아하게 된 것도 십 년이다. 요즘에는 거의 아이피에이를 마신다. 필스너나 바이젠이 생각날 때도 있지만 80%는 아이피에이다. ‘쓴맛’이라며 멀리했던, 아이피에이 안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맛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피에이의 탄생 설화와 출세와 쇠락과 부활 같은 것에 대해서.

내수용이 아닌 인도로 수출되는 맥주인 아이피에이를 영국 본토 사람들이 어찌어찌해서 마시게 되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라 영국에도 아이피에이가 확산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나 잘 되었는지 배스(Bass)라는 아이피에이 맥주를 만들던 회사는 영국 최초로 상표 등록을 한다. 배스를 좋아하던 나폴레옹은 프랑스에도 배스 공장을 세우기를 원했는데 이루어지지 않는다. 배스의 아이피에이 맛을 결정한 가장 큰 요소는 몰트도 홉도 아니요, 물이었기 때문이다. 배스는 버턴온트렌트라는 석회질 토양이 특징인 고장에서 만들어졌는데, 프랑스에서 이와 비슷한 토양을 찾지 못했다고. 그렇게 아이피에이 사업이 잘 굴러갔는데, 영국 정부가 주세법을 바꾸면서 아이피에이는 쇠락한다. 알코올 도수에 따라 주세를 매기기로 하면서 도수가 높은 아이피에이는 비싸졌고 사람들은 잘 찾지 않았다고.

미국에서 크래프트 비어 붐이 일어나면서 다시 부활한다. 뭔가 다른 거, 뭔가 새로운 걸 찾던 맥주 제조자들은 인디아 페일 에일 스타일에 착안, 홉을 활용한 맥주를 만들기 시작하고, 이게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홉이 강한 맥주는 아이피에이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하고 싶다. 버턴온트렌트 같은 토양이 아니라도 전 세계에서 아이피에이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바다에 길을 내던 이야기를 좋아한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그 길을 가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배에 싣고 간 물건, 싣고 돌아온 물건 같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후추와 카다멈과 육두구 같은 향신료를 가지러 아시아에 가던 유럽인들은 배에 은화를 싣고 갔다고 들었다. 아시아에서 팔 수 있는 마땅한 물건이 없으니 수요가 큰 은화를 가져갔다고. 그랬다가 인디아 페일 에일까지 싣고 가게 되었던 것이다. 맥주가 무거워서 배의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앞에서 영국에서 인도까지 십 개월이 걸렸다고 적었는데, 사 개월이 걸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나 싶었는데 얼마 전에 궁금증이 풀렸다. 202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 ‘바닷가에서’를 읽다가였다. 계절풍 때문이었다. 일 년의 마지막 몇 달은 인도양을 지나온 바람이 아프리카 해안으로 불고, 해가 바뀌어 몇 달은 바람이 방향을 바꿔 거꾸로 분다. 그래서 상인들은 아프리카 쪽으로 바람이 불 때 아프리카에 왔다가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 동쪽으로 돌아간다. 아라비아해의 사람들은 인도양의 바람에 맞춰 천 년 넘게 그렇게 해왔다고.

이 바람의 이름이 ‘무심’이다. 아랍어인 이 말은 포르투갈어를 거쳐 전해지면서 ‘몬순’이 되었다. 아이피에이를 싣고 인도로 가던 이들도 무심을 타고 갔다. 무심이 뒤에서 밀어주면 빨리 갔을 테고, 무심이 도움을 주지 않거나 방해하면 오래 걸렸을 것이다. 바람에 올라타야 제대로 갈 수 있었다. 아이피에이 한 캔을 마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이래서 나는 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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