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정장' 재단사 3인 "바지통 넉넉하게, 대통령 이건 양보 안하더라"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입력 2022. 5. 28. 03:06 수정 2022. 5. 31. 18:2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성윤 기자의 공복]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정장 만든
양복점 '페르레이' 재단사 3인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지난 10일. 주요국 외빈, 4대 기업 총수, 국민희망대표 20인을 비롯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초대된 수많은 인사 중 양복 재단사 3명이 포함됐다. 초청자 명단에도 적혀 있지 않았던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식 양복을 지은 주인공들. 서울 성북동에 있는 맞춤 양복 전문점 ‘페르레이’ 소속 재단사들이었다.

지난 19일 찾아간 페르레이는 한성대입구역 뒤 골목에 있는 조그만 가게였다. 통유리창 안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양복 재킷을 걸친 마네킹이 놓여 있었다. 유리문 안쪽에 세워둔 또 다른 마네킹에는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이라고 인쇄된 노란 펜던트가 걸려 있었다. 손미현(33) 대표는 “취임식 참석했을 때 목에 걸었던 펜던트”라며 웃었다.

손 대표는 평균 연령 70대 남성이 절대 다수인 국내 맞춤 양복 업계에서 보기 드문 30대 초반 여성 재단사. 그는 또 다른 30대 재단사 김남훈(36)씨, 경력 50년이 넘는 ‘마스터 테일러’ 박상학(69)씨와 함께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식 날 입은 네이비 블루 색상 양복을 지었다. 취임식뿐 아니라 대선 경선과 유세 기간 윤 대통령이 입은 양복 다섯 벌을 이들이 만들었다. 세 사람은 “우리 손으로 지은 옷을 입고 취임 선서 하시는 대통령을 보니,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고 했다.

서울 성북동 ‘페르레이’는 작은 양복점이었다. 손미현(가운데) 대표와 박상학(왼쪽)·김남훈 재단사. 세 사람은 “대통령 양복 만들기보다 사진 촬영이 훨씬 어렵다”고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치수 재러 갔더니 윤 후보가 기다렸다

-어떻게 취임식에 초대받았나.

손미현(이하 손): “대통령 옷을 만들어드린 인연 덕분으로 알고 있다. 저희뿐 아니라 윤 대통령이 초임 검사로 대구지검에 근무할 때 살았던 하숙집 주인 부부, 유세 기간 시장에서 악수한 상인 등 대통령과 인연 있는 분들을 초대했다고 들었다.”

-윤 대통령의 양복을 주문받은 계기가 있었나.

손: “지난해 여름이었다. 인스타그램 DM(다이렉트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모르는 여성이 비공개 계정을 통해 보낸 메시지였다. ‘중년의 덩치 크고 뚱뚱한 아저씨인데 세련되고 날씬하게 보이게 만들어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평소 비슷한 문의를 자주 받는지라 ‘당연히 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DM을 몇 차례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혹시 집으로 와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손님이 가게를 방문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평소 입는 양복을 입고 오시라고 해서 그분 취향과 스타일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사람이 느낌이란 게 있지 않나. 꼭 집으로 방문해야 하는 VIP인가 보다 싶었다. 가겠다고 하니, 그때부터 직원이 연락해왔다. 실장님(김남훈)과 함께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니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가 기다리고 있더라. 깜짝 놀랐다.”

-DM은 누가 보낸 것이었나.

손: “김건희 여사가 직접 보낸 거였다. 나중에 들으니, 김 여사가 손수 인터넷을 검색해 우리 가게를 찾았다고 하더라.”

-그 전까지는 윤석열 대통령 내외를 알지 못했다는 뜻인가.

손: “전혀 인연이 없었다. 직원이 시간 약속을 잡으면서 ‘정보가 딴 데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기업 회장 비서실 같은 곳에서도 그런 식으로 연락하는 경우가 많아 그런 분야에 계신 분이려니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0일 대통령 취임식 때 페르레이에서 맞춘 양복을 입었다. /국회사진기자단

-그 많은 맞춤 양복점 중 왜 선택했을까.

손: “그러잖아도 김 여사에게 여쭤본 적이 있다. ‘좋은 후기가 엄청 많았다’고 하시더라(웃음).”

-대표 처지에선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손: “젊은 여성이 운영하는 곳이라 감각이 있고, 소통도 더 원활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김 여사를 만나 이야기해 보니, 젊은 친구들이 하는 스타트업 회사에 관심이 많으셨다.”

-실제로 본 윤 대통령의 첫인상은 어땠나.

손: “원래 누구 앞에서 위축되는 편이 아닌데 긴장되더라. 그분이 검찰총장 출신이어서 그런가?(웃음) 죄 지은 것도 없는데…. TV를 잘 안 보지만 워낙 유명한 분이라 누구인지는 알았는데, 체격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다부진 느낌이었다. 포스도 느껴지고. 그런데 성격은 굉장히 소탈하시더라. 체촌(體寸·몸 치수 재기) 하는 동안 격의 없이 대해주셨다. 직원들과 농담도 많이 하고 장난도 치셨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윤 대통령이 음식에 관심 많고 평소 요리도 한다고 알려졌는데.

손: “사실 같다. 나중에 가봉(대강 만든 양복이 잘 맞는지 손님이 입고 확인하는 일)하러 간 날, 주방에서 무언가를 요리하다 나오시더라.”

◇”바지통만큼은 남편이 원하는 대로 해달라”

-재단사로서 윤 대통령은 어떤 체형의 고객이었나.

손: “솔직히 양복 만들기 쉬운 체형은 아니다(웃음). 우선 어깨가 앞으로 말려 있었다. 공부 많이 한 분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있으면 체형이 그렇게 변한다. 게다가 양 어깨가 심한 짝짝이다. 양복 만들면서 어깨 라인을 맞추는 데 가장 포커스를 뒀다.”

김남훈(이하 김): “허리를 줄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대신 어깨에 넉넉하게 볼륨을 넣어 넓어 보이게 함으로써 허리가 상대적으로 가늘어 보이게 했다. 남성미를 살리면서 날씬해 보이도록 양복을 재단했다.”

박상학(이하 박): “대통령님처럼 배가 좀 있는 체형은 옷이 뜨거나 뒤로 당겨질 수 있다. 옷이 몸에 안착하도록 신경 써서 잡았다. 역V존(단추 아래 재킷이 벌어진 부분)을 일반적인 경우보다 넓게 벌려 다리가 길어 보이게도 했다. 단추 위치도 일반 재킷과 다르게 했다.”

-옷을 특별히 어떻게 만들어달라는 주문은 없었나.

손: “대통령님은 ‘와이프(아내)가 이쪽으로 전문이니, 다 와이프와 상의해 알아서 해달라’고 하셨다. 단, 바지통만큼은 넉넉하고 편하게 해달라고 했다. 유일하게 그것만 주문하셨다. 우리는 ‘바지는 슬림하게 가는 게 어떻겠냐’고 계속 권했지만, 윤 대통령이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다(웃음).”

-김건희 여사에게 부군 설득을 부탁할 수 없었나.

손: “김 여사도 ‘남편의 바지통 고집은 나도 말릴 수 없다. 남편이 원하는 대로 해달라. 대신 너무 펄럭거리게만 하지 말아달라’고 하더라. 줄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 “요즘도 TV에서 대통령님을 보면 다시 바지통을 줄여드리고 싶다(웃음).”

윤석열 대통령의 재킷용 패턴. 신체 치수로 종이 패턴을 만들어 원단을 재단해 옷을 만든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양복을 모두 몇 벌 지었나.

손: “봄·가을옷과 겨울옷 각 2벌, 여름옷 1벌 등 다섯 벌을 먼저 맞췄고, 취임식용으로 한 벌을 더 맞췄다. 유세 때는 보수적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라펠(재킷 깃)의 각을 줄여서 약간 처지게 디자인했다. 반대로 취임식은 경사스러운 날인 만큼 라펠을 세워 화려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연출하도록 했다. 말이 쉽지 1~2mm 미세한 차이를 바느질로 구현해내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숙련된 재단사가 아니면 힘들다. 우리 박 선생님이 고생 많이 하셨다.”

박: “재단사 입장에선 까다로운 손님이었다. 하지만 힘들어도 까다로운 손님이 좋다. 만족시켜드렸을 때 성취감이 크다.”

손: “김건희 여사의 옷에 대한 이해도가 엄청 높더라. 보통 여성분들은 깃 크기를 좁혀달라 넓혀달라 정도만 주문하는데, 김 여사는 깃 각도까지 섬세하게 요구했다. 남편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딱 알더라. 정치인으로서 보여줘야 하는 이미지가 있는데, 양복을 어떻게 만들고 입었을 때 그런 이미지가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양복 자주 맞추는 남성 단골들도 그렇게 세세하게 요구하진 않는다. 미술을 전공하셔서 그런지 비율을 잘 보는 안목이 있어서 많이 놀랐다.”

김: “완성된 양복을 보고 ‘옷이 들뜨지 않고 몸에 잘 안착돼 날씬해 보인다’고 평해서 기쁘면서도 놀랐다.”

박: “김 여사가 ‘옷을 보니까 선생님 마음이 보인다’고 하셔서 감동했다(웃음).”

손: “섬세하고 다정다감하더라. 한번은 과자를 간식으로 주셨는데, 과자가 담겨 있던 나무 통이 예쁘고 튼튼해 보여 ‘바늘통 하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했는데, 그걸 들은 모양이다. 다음에 방문했을 때 빈 통 4개를 챙겨뒀다가 주시더라.”

-대통령의 양복이니 고급이었겠다.

손: “200만원 정도다. 우리 가게 기준으로는 중가~중저가에 해당한다. 양복은 원단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윤 대통령 양복은 모두 국산(제일모직) 원단을 사용했다. 상담하고 체촌하고 원단을 정해서 금액을 말씀드리니 그 자리에서 바로 개인 송금 해주셨다. 김건희 여사가 ‘남편이 공무원이라 돈 문제에서는 진짜 노이로제처럼 철저하게 한다’고 말하더라.”

-양복에 받쳐 입을 셔츠는 안 맞췄나.

손: “열 벌 맞췄다. 윤 대통령이 평소 입는 셔츠를 보니 칼라(깃)가 너무 넓었다. 그래서 얼굴이 더 커보인다고 판단해 좀 좁은 칼라를 제안했다.”

-그 밖에 제안한 건 또 없나.

손: “서스펜더(멜빵)를 해보시면 어떻겠느냐 권했는데 안 하셨다. 익숙하지 않아 거부감이 있는 듯하다.”

박: “한국 남성들은 서스펜더를 잘 하지 않지만, 해보면 허리띠보다 편하고 바지도 흘러내리지 않아 좋은데 아쉽다.”

◇'천연기념물’ 30대 여성 재단사

김남훈씨 같은 30대 재단사는 평균 연령이 70대인 국내 맞춤 양복 업계에 드물다. 더구나 손미현 대표처럼 30대 초반 여성 재단사는 천연기념물에 가깝다. 생계를 위해 이 바닥에 뛰어들어 50년 넘게 일하고 있는 박상학씨는 재단사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마스터 테일러’로 꼽힌다. 이들은 어떻게 대통령의 재단사가 되었을까.

-재단사가 된 과정이 궁금하다.

손: “중학교 시절부터 패션에 관심 많았지만 다른 학생들처럼 평범하게 일반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잘 맞지 않았다. 스물두 살 때 패션 학교에 진학했지만 그냥 막연하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방황하다가 종로 5가 한 양복집에서 일하던 친척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무작정 찾아갔는데 수제 양복 일을 권해주셨다. 학교와 전혀 다른 현장도 좋았고, 일 마치고 선생님(재단사)들과 술 한잔 하는 분위기도 정겨웠다. 2년 정도 돈 받지 않고 일하고 배웠다. 거기서 박상학 선생님도 만났다. 당시 박 선생님은 ‘줄반장’이었다. 당시 일하던 공방에서 재단사 20여 명이 일했는데, 이 중 10명이 길게 한 줄로 앉으면 그 끝에 박 선생님이 앉았다. 다른 재단사 선생님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는 자리다. 재단사들 중에서도 솜씨 좋은 ‘마스터 테일러’가 줄반장을 맡는다.”

김: “10대 때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아 다양한 옷을 입어봤다. 남성복의 정점은 클래식 웨어였다. 음식을 좋아하면 요리에 관심이 생기는 것처럼, 직접 옷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군대 전역 후 기술을 배우려고 종로 일대 공방 문을 두드렸다. 10여 년 동안 도제식으로 수련했다. 좀 더 트렌디하고 미적 완성도가 높은 슈트 패턴을 설계하기 위해 수업료 낸다 생각하고 비싼 외제 슈트를 사다가 뜯어서 패턴을 분석하고, 내 패턴에 적용해본다. 지금까지 여덟 벌 정도 분해한 것 같다(웃음). 정해진 공식에 갇히지 않고, 고객 요구를 한계 없이 옷으로 구현할 수 있는 패턴으로 설계하는 것이 내 목표다.”

박: “열여덟 살 때 온 가족이 고향인 경남 밀양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아는 사람이 을지로에서 양복점을 하고 있어서 들어가 배우게 됐다. 밀양 살 때 집에서 교복을 했기 때문에 옷에 조금 관심 있었고 미싱(재봉틀)을 어떻게 쓰는지 등 감은 있었다. 하지만 옷을 좋아하거나 재단사가 되고 싶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한 달에 1500원 받았다. 당시 버스가 5, 6원이었던 것 같다. 요즘 알바생들 임금 정도 받은 듯하다.”

김남훈(오른쪽) 재단사가 디자인한 패턴을 손미현 대표, 박상학 테일러와 상의하고 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때 양복점은 요즘과 많이 달랐나.

박: “처음엔 연탄 다리미로 일했다. 연탄불을 피우고 쇳덩어리 다리미를 올려놨다가 뜨거워지면 쓰고 식으면 다시 올려놓는 식이었다. 정전도 많았고 전기 화재도 자주 나서 연탄 다리미를 썼다.”

-본인 가게를 차리고 싶지는 않았나.

박: “10년 이상 했지만 기성복에 밀리기도 했고 힘도 들어서 그만뒀다가 다시 일하게 됐다. 배운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손 대표는 인스타그램, 블로그 등 온라인에서 ‘미스미자(missmija)’로 유명하더라.

손: “어려서부터 별명이 미자였다(웃음). ‘미자씨’로 하려고 했는데 이미 누군가 사용하는 아이디였다. 젊은 여성이 남성 맞춤복을 만드는 모습과 과정을 글로 쓰고 사진 찍어 인스타와 블로그에 올리는 게 신기해 보였는지, 손님이 확 늘었다. 그걸 계기로 내 사업을 하게 됐다.”

손 대표는 ‘페르레이(Per Lei)’를 2015년 창업했다. 이탈리아어로 ‘당신을 위한’ ‘그녀를 위한’이라는 뜻이다. 손 대표는 “고객(당신)은 물론 나(그녀) 자신까지 만족할 옷을 짓겠다는 뜻”이라고 했다.

-여성 디자이너들은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패스트 패션이나 비싼 명품을 선망하지 않나.

손: “트렌드를 좇는 성격도 아니고 명품 백도 하나 없다. 맞춤 옷은 기성복과 달리 사람과 사람이 만나 진행한다는 점도 좋았다. 남성 맞춤 양복을 여자가 하면 더 매력적일 수 있겠다는 판단도 있었다.”

-잘 만든 옷이란 무엇인가.

손: “잘 만든 옷은 체형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최대한 가려줘 돋보이게 해준다.”

-뭘 보면 잘 만든 옷인지 못 만든 옷인지 알 수 있나.

손: “옷이 얼마큼 손님한테 잘 흐르느냐를 본다. 옷이 잘 맞아떨어져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느낌이 나야 한다.”

김: “잘 만든 옷은 입었을 때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윤 대통령 외에 다른 VIP 손님은 누가 있나.

“그룹 회장, 대기업 CEO, 외국 기업 임원, 법조인, 의사, 연예인 등 다양하다. 하지만 모두 신분을 드러내길 원치 않는다. 이번 인터뷰는 대통령실에서 허락을 받았기에 가능했다.”

◇슈트는 시대 맞춰 진화… 사라지지 않아

-양복 재단사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건 아마도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일 듯하다. 뭘 입고 갔나.

김: “당연히 우리 손으로 만든 옷을 입고 참석했다.”

-본인이 만든 양복을 입고 대통령이 취임 선서 하는 모습을 보니 어땠나.

손: “이 업을 한다는 것이, 진짜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뿌듯하더라.”

박: “가문의 영광이지. 진짜 영예다.”

김: “대통령 옷을 한다는 건 진짜 이 산업의 끝 아닌가? 하하!”

‘페르레이’ 입구에 걸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 참석자 펜던트./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대통령의 양복집으로 알려지면 주문이 폭주하겠다.

“어차피 만들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양복 한 벌 짓는 데 100시간, 3~4일 정도 들어간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사나흘 걸릴 걸 하루 만에 할 수 없다.”

-왜 그렇게 오래 걸리나.

“손님과 처음 만나 상담하고 치수를 잰 뒤, 이를 바탕으로 종이 패턴을 만들어 원단 자르고, 1·2차 가봉을 통해 수정한 다음 최종 바느질까지 하려면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점점 더 양복을 입지 않는 시대다. 코로나 이후 재택근무가 늘면서 캐주얼화가 더욱 강해졌다. ‘드레스다운(dress down)’의 시대, 맞춤 양복 존재 이유가 있을까.

김: “누군가는 꼭 양복을 입어야 한다. 결혼 예복이건, 비즈니스 슈트건. 양복이 사라질 수는 없을 것 같다.”

박: “양복 재킷 대신 좀 캐주얼한 사파리 재킷을 맞추는 손님이 늘었다. 시대 변화에 적응해 바뀌고 진화하지만 맞춤옷 자체의 효용성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손: “과거 맞춤복은 그저 필요에 따라 입던 옷이었지만, 기성복이 나오면서 예술의 하나가 됐다. 이 멋진 기술의 가치를 알리고 싶고,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도록 하고 싶다. 그러려면 세대교체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지금 맞춤 하는 테일러들은 박 선생님처럼 70~80대가 주를 이루고 있다. 후계를 양성하고 기술을 보존하려면 교육이 필요하다. 우리가 테일러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이유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