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중앙일보

[김태유의 퍼스펙티브] 연안국 저주 풀려면..한국, 미·러와 모두 관계 증진해야

입력 2022. 05. 30. 00:34 수정 2022. 05. 30.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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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과 한국의 선택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과 명예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3개월 이상 지속하고 있다. 여론이 우크라이나에 동정적이고 러시아에 비판적이다. 아마도 늑대에게 쫓기는 사슴을 보듯 한국인의 타고난 선량한 심성이 약한 자를 응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실상 우리가 느끼는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피해자에 대한 연민은 과거 우리가 중국과 일본에 침략당한 아픈 기억이 뇌리에 각인된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지 우크라이나 전쟁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는 한·중, 한·일 관계 이상으로 양국 간에 복잡한 속사정이 있다고 한다. 이럴 때일수록 선과 악의 대결 같은 감정보다는 국제 정서에 기반을 둔 냉철한 이성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우리의 대처가 한반도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숙고해보자.

「 러시아의 반인도적 침략은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나
러시아와의 대결을 자제하는 외교적 실익 추구해야
한국과 주변 4강의 세력 균형은 자유·평화·번영 기반
지정학적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대외정책 펼쳐야

성공하는 외교와 실패하는 외교

지난 2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지역에서 러시아 공세에 대비해 대전차 소총을 설치하는 우크라이나군 병사. 러시아군은 도네츠크 지역 공세에 집중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핀란드 헬싱키 소재 싱크탱크인 에너지·청정대기연구소(CREA)에 따르면 지난 2월 24일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가 두 달간 석유·천연가스 등 화석연료를 유럽연합(EU)에 수출하고 받은 돈만 440억 유로(약 60조원)에 달한다. 올레그 우스텐코 우크라이나 대통령 경제보좌관은 뉴욕타임스(NYT) 기고에서 “유럽은 전쟁이 시작된 뒤에도 계속된 러시아 원유 수입으로 군자금을 댔다. 푸틴에게 전쟁은 수지맞는 장사였다”고 비판했다.

미국 등 서방 국가의 러시아 제재가 겉보기만큼 강력한 것도 아니고 석유·천연가스 등의 대러시아 의존도가 50%를 넘는 독일 등 EU 국가들의 러시아 제재와 에너지 도입 중단은 시작은 해도 오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을 보필해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헨리 존 템플 총리는 “영국에게는 영원한 동지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영원한 것은 국가의 이익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강대국의 선진 외교란 명분을 따르는 줄서기가 아니라 철저히 실리에 기반을 둔 새로운 국제 관계의 구축임을 알 수 있다.

이와 반대되는 후진 외교라면 친명반청(親明反淸)이라는 명분과 과거에 집착한 조선의 참담한 외교 실패를 들 수 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以小逆大)는 4불가론의 시작부터 사대(事大)로 점철된 조선에 외교란 없었고 오직 줄서기만 있었을 뿐이다. 임진왜란의 명나라 참전도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는 차원에서,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는 왜군과의 전쟁터로 조선을 선택한 측면이 컸다. 명군이 왜군의 격멸보다 명의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조선을 왜군과 분할하는 협상에 더 큰 노력을 투입한 것만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감정과 명분에 집착한 조선의 외교 참사는 삼전도의 굴욕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양민 납치와 환향녀의 눈물에 이르기까지 씻을 수 없는 치욕과 고통만을 남겼을 뿐이다. 물론 조선의 명·청에 대한 사대를 실리 외교 측면에서 재해석해볼 여지도 있다.

연안국의 운명과 외교적 균형

그렇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반도의 지정학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도서국(島嶼國)과 내륙국(內陸國) 사이에 위치한 연안국(沿岸國)의 운명이 바로 ‘지정학적 저주’이다. 서유럽 역사는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은 백년전쟁 이래 프랑스와 전쟁사에 이름이 남을 만큼 큰 전쟁만 16번을 했다. 전쟁터가 대부분 프랑스였다는 사실은 영국이 침략자였고 프랑스가 피해자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프랑스는 국토가 영국의 2배, 인구는 3배가 넘는 대국이었는데 어떻게 소국 영국의 침략을 계속 받았을까. 그 이유는 도서국 영국은 해군이 강하고 연안국 프랑스는 육군이 강하기 때문에 영국은 프랑스를 침략할 수 있어도 프랑스는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을 쳐들어가기 어려웠다.

내륙국 독일도 연안국 프랑스보다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독일은 오스트리아·체코·폴란드 등 주변국을 합병하여 덩치를 키운 후 1, 2차 세계대전 등에서 연안국 프랑스를 침략했다. 프랑스는 서유럽에서 국토가 가장 큰 대국이었음에도 도서국 영국과 내륙국 독일의 끊임없는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연안국의 운명이고 지정학적 저주이다. 그런데 동북아시아에서 조선은 더 큰 도서국 일본과 수십 배나 더 큰 내륙국 중국 사이에 위치한 연안국이다. 따라서 조선이 일본과 중국의 침략에 시달린 것이 조선의 잘못만도 아니고 꼭 그렇게 수치스러울 일도 아니다.

문제는 연안국 조선의 지정학적 저주를 한국이 과연 벗어날 수 있는가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외교적 선택 여하에 따라 연안국의 운명을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은 지리학(地理學)적으로 도서국 일본과 내륙국 중국 사이에 놓인 ‘약소국’이었지만, 한국은 지정학(地政學)적으로 남방 해양국 미국과 북방 대륙국 러시아까지 4강 사이에 위치한 ‘강소국’이기 때문이다. 조선에 주어진 선택지는 오직 2개, 양자택일이었지만, 한국에 주어진 선택지는 4강과의 모든 조합이 가능한 24개에 달한다.

미국, 우방의 대러 제재에 예외 묵인

동북아 5강(한반도 주변 4강+한국)의 세력 균형을 상정해보면 1815년 빈 체제가 상기된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총리는 빈 체제를 유럽의 안정을 위한 5강의 균형 잡힌 외교로 보았다. 저서 『회복된 세계』(1957)에서 그는 빈 체제 이후 100여 년 유럽의 안정은 열강 사이에 합의된 정통성(legitimacy) 때문이라고 했다. 빈 체제가 자유주의 이념의 확산을 막고 구체제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면, 동북아 5강의 세력 균형은 전쟁의 파괴와 살상을 막고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위한 것이다. 빈 체제가 정의롭지는 않았지만 정통성이 있었다면, 동북아의 세력 균형은 정의롭기도 하고 정통성도 있다. 그래서 동북아의 세력 균형은 빈 체제보다 더 안정적일 수 있다. 만약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에 즈음한 한국의 선택이 한·미 동맹을 손상하거나 러시아와 척을 지는 일만 없다면 말이다.

미국은 우방의 대러 제재에도 예외를 묵인하고 있다. 미국의 맹방 이스라엘은 대러 경제 제재에 불참했고, 미사일 방어용 아이언돔과 첩보용 페가수스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수출 요청도 거절했다. 인도는 대러 제재는커녕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2배나 늘렸다. 인도네시아는 미국의 반대에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G20 정상회의에 초청했다. 일본은 대러 경제 제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만, 석유·천연가스 개발 사업인 사할린-1과 사할린-2 프로젝트 등 자국 에너지 안보 관련 사업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국의 최대 동맹국인 EU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방위비 인상, 러시아산 석유·천연가스 수입선 대체 비용, 미국에 대한 전략적 자율성 등 손익 계산에 분주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파괴와 살상은 어떤 이유로든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만행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의라고 하는 대의명분과 이행 가능한 국제적 합의라고 하는 외교적 실익의 조화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키신저는 외교를 “무력의 행사를 제한하는 예술” 또는 “정통성에 기반을 둔 균형 질서의 구축”으로 표현했다.

균형 외교만이 한국의 새 천년 열어

한때 미국에서 유해 동물로 지정된 늑대는 사냥이 허락되고 보상금까지 걸렸다. 1926년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늑대가 완전히 사라지고 평화가 왔다. 그런데 사슴의 과잉 번식으로 풀과 숲이 사라지고 강물이 토양을 침식하는 등 생태계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사슴이 농작물까지 먹어 치우자 농민의 원성이 높았다. 그러나 옐로스톤 생태계를 복원하려는 정부의 어떤 노력도 실패만 거듭할 따름이었다. 1995년 14마리의 늑대가 방사되었다. 옐로스톤 생태계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복원되기 시작했다. 풀과 숲이 살아나고 새들이 돌아오고 강에 비버와 물고기들이 땅에는 토끼와 설치류가 번성하게 되었다. 늑대는 옐로스톤 생태계의 수호자였다.

성숙한 부모라면 TV를 보며 사슴을 공격하는 늑대를 미워하는 순진한 어린이에게 늑대도 생태계의 중요한 일부라는 자연의 법칙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성숙한 지도자라면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재편될지 모를 국제 질서가 언젠가 동북아의 지정학적 생태계 복원에 결정적인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여론을 환기하고 현명한 대외 정책을 추진해나가야 한다. 이 같은 균형 외교만이 연안국 한국의 천년 묵은 지정학적 저주를 새 천년의 지정학적 축복으로 거듭나게 할 전환점이 될 것이다.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과 명예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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