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타자'며 내위 올라탔다..어른들은 모르는 10대 무법천지

오유진 2022. 6. 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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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가상공간 속 아이들


이곳에선 ‘반모(반말 모드)’가 기본이다.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모두 내 맘대로 정할 수 있다. 비싼 아이템과 빼어난 외모만 갖춘다면 수천 명이 다가와 말을 건다. 교실, 한강 공원부터 공연장, 해외 유명 여행지까지 2만여 개의 공간을 30초 간격으로 오갈 수 있다. 제2의 ‘나’를 만들 수 있는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ZEPETO)’ 이야기다. 요즘 10대는 놀이터도, PC방도 아닌 이곳 ‘제페토’에서 논다. 2018년 8월 출시 후 누적 이용자가 3억명에 달한다.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제페토 이용자 중 50.4%가 7~12세, 20.6%가 13~18세다. 라인 플레이, 로블록스, 호라이즌 월드 같은 다른 메타버스 플랫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최근 이곳이 ‘10대들의 놀이터’가 아닌 ‘10대들의 무법지대’로 변질됐다.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1일까지 제페토에서 ‘17세, 여성, 닉네임 탱탱볼’로 살아봤다.

10대 사이버 사기 피해자 갈수록 늘어

“탱탱볼은 거지야? 왜 이렇게 옷이 별로야?”

지난달 28일 제페토 월드의 교실에서 만난 유저 하늘(8)이 다짜고짜 물었다. 현실에서는 무례한 질문이지만, 제페토에서는 당연한 얘기다. 이곳에서는 비싼 아이템과 화려한 아바타가 곧 자신을 증명한다. “돈이 없어서 옷을 못 샀다”고 하자 그는 “나는 엄마 몰래 꾸며진 계정을 샀다”며 “기본 아이템으로 돌아다니면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하늘은 미성년자가 제페토 내에서 아이템을 구매하려면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타인의 계정을 3만원에 샀다고 설명했다. 사기를 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메타버스 세계에서 계정과 아이템은 10대들의 돈벌이 수단이자 범죄 도구다. 14세 미만 아동·청소년의 경우 보호자의 동의와 실명인증을 받아야만 게임 이용 및 유료결제가 가능한데, 이 안전망을 현금 박치기로 뚫는다. 플랫폼의 규제가 유명무실인 셈이다. 성인 인증을 받은 계정은 아이템과 팔로워 수에 따라 적게는 1000원, 많게는 수백만원에 팔린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거래 사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점이다. 제페토에서 만난 17세 유저는 “이 게임 하는 사람들은 다 한 번쯤 사기를 당해봤을 것”이라며 “계정과 아이템을 사고팔면서 당한 사기 피해액을 모으면 300만원가량 정도 된다”고 답했다. 부모님에게 말하거나 경찰에 신고는 했냐고 묻자 “혼날까 봐 비밀로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더불어민주당 오영환 의원실에 따르면 경찰에 접수된 10대 대상 사이버 사기 피해자는 2016년 1만3542명에서 2020년 2만930명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 추세다. 제페토와 유사한 게임 플랫폼인 라인 플레이에서 30만원의 사기를 당했다는 이혜연(16)씨는 “누구에게 샀는지, 팔았는지 추적하기도 어려워 어차피 신고해도 못 잡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다음날인 29일 접속한 캠핑장은 방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여자만 들어오세요’. 이곳의 방장인 유저 틱톡은 “채팅으로는 금지된 단어가 많다”며 음성 대화를 권유했다. 20대 후반 남성이라고 밝힌 그는 “제페토에서 여자 만나는 게 꿈”이라며 나이를 물었다. 17세라고 대답하자 곧바로 “제페토 말고 현실에서도 만날 생각 있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함께 접속했던 5~6명의 유저 중 그를 제지하거나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대답을 피하자 “성교육 받아볼래?”, “나랑 썸타자”라며 아바타 위에 올라탔다. 뒤늦게 신고 버튼을 눌렀지만 즉각 조치가 취해지진 않았다. 동일한 경험을 했다는 유저 나타샤(14)는 “모르는 사람에게 채팅이 오면 90% 이상이 성적인 내용”이라며 “성적인 행동을 묘사하거나 신음소리를 들려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제페토 속 사이버 폭력과 범죄행위는 가상세계를 넘어 현실에까지 퍼져 장난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어려운 수준이다. 실제로 지난 4월에는 제페토에서 초·중·고생 11명을 꼬드겨 성착취물을 제작한 30대 남성이 구속됐다. 이 남성은 자신을 21살 남성이라 속여 아동·청소년 유저에게 메타버스 내 유료 아이템을 선물하고,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개인정보를 알아내 신체 사진을 요구하는 등의 수법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이런 피해를 막을 수 있는 뚜렷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운영사인 네이버 제트 측은 커뮤니티 가이드라인과 규제를 신설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대화나 행동을 검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일반 게임의 경우 비속어 등을 화면에 보이지 않게 가릴 수 있지만, 음성·이미지·동영상 등 멀티미디어를 활용하는 메타버스에선 이를 모두 필터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다 보니 이용자들도 피해를 알리거나 신고하기를 망설인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설문조사에 따르면 사이버 폭력 발생 시 고객센터나 경찰에 신고한 경우는 4.9%에 불과했다.

경찰에 신고한 사이버 폭력 5% 불과

메타버스 내 범죄가 실제 사람이 아닌 ‘아바타’를 대상으로 이뤄졌단 이유로 법적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도 걸림돌이다. 국내법상 아바타가 인격권을 인정받아 처벌까지 이어진 사례는 드물다. 하지만 메타버스 속 아바타는 과거의 게임 캐릭터와 차원이 다르다. 메타버스 안에서 소셜 네트워킹이 가능하고,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에서 활동하다보니 이용자들에게는 ‘제2의 자아’나 다름없는 몰입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정준화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10대 청소년들은 아바타에 느끼는 정서적 일체감이 커 아바타 간 이뤄지는 추행도 물리적인 고통으로 느낄 수 있다”며 “아바타를 성범죄 보호 대상으로 편입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규제만큼이나 시급한 것은 학부모나 학교, 사회 차원의 지속적인 모니터링이다. 서민수 경찰인재개발원 교수는 “플랫폼의 자율적 규제나 법·제도적 보완이 요원한 상황에서는 학부모, 학교 등의 선제 교육이 중요하다”며 “아동·청소년 보호자들이 메타버스 범죄에 대응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교육, 감시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메타버스가 아이들의 천국이 될지, 혹은 지옥이 될지는 결국 어른들의 손에 달렸다.

■ 기성세대, 메타버스 문제 체감한 뒤 해결 방안 모색해야

김명주 교수

인공지능(AI), 메타버스를 비롯한 첨단 기술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줬지만, 그와 동시에 다양한 윤리적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AI는 양심이 없다』의 저자인 김명주 서울여대 정보보호학과 교수는 “기술 발전으로 발생하는 비윤리적 행위를 법·제도만으로 막을 수 없다”며 “기성세대가 나서서 메타버스를 접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직접 체감해 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하는 디지털 윤리 역량을 길러야 아이들을 지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Q : 신기술 도입 때마다 윤리 문제가 반복된다.
A : “메타버스, 인공지능, 가상현실 등 신기술을 활용하면 더 편리한 삶을 살게 되고, 경제적으론 기회가 생긴다. 그와 동시에 그동안 억눌렸던 내적 욕구가 함께 분출되는데, 문제는 이 욕구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는 거다. 기술을 잘 활용해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기술의 맹점을 이용해 사적 이익을 취하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신기술을 도입하기 전 공론장에서 기술의 윤리적 허점에 대해 논의해야 했는데, 그 지점이 부족했다. ‘얼마나 많이 발전했냐’에만 집중하다 보니 그 내용이 생산적이고 윤리적인지는 점검하지 못한 거다. 딥페이크 기술을 악용한 N번방 사건, 혐오 발언으로 논란이 됐던 AI 챗봇 이루다 사태, 또 지금의 메타버스 범죄가 발생한 이유다.”

Q : 개발자들은 문제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데.
A : “커뮤니티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AI 모니터링 시스템을 활용해 범죄 등에 대응하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면피용에 불과하다. 이용자 수천만 명의 동시다발적 행동을 100% 모니터링하는 게 가능할까. 특정 행동을 패턴화해 적발한대도 지금의 기술력으론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할 확률이 더 높다. 또한 메타버스 안에서 이뤄지는 대화나 행동은 과거 게임 속 채팅과 달리 사생활 영역이다. 회의도 하고, 상거래도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제2의 사회다. 모든 활동을 ‘빅 브라더’처럼 감시하는 건 사생활 침해가 될 수 있다. 제작자의 선의에만 의존하지 말고 이용자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Q : 법·제도를 손보면 해결될까.
A : “지금 당장 문제가 발생했다고 성급하게 법을 만들어선 안 된다. 법을 만드는 기성세대는 메타버스가 어떤 곳인지, 어떤 문제를 양산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지 않나. 국민 대다수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법을 만들었다간 향후 신기술의 발전 가능성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 또한 메타버스는 전 세계인이 함께 공유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국내법을 손본다고 해서 원천적인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다. 법·제도 개선은 가장 마지막에 이뤄져야 한다.”

Q : 현실적인 대책은.
A : “아동·청소년들은 어떤 문제가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문제의 당사자기 때문이다. 당장 필요한 건 사회 결정권자인 기성세대의 변화다. ‘메타버스 게임 하지 마’라고 할 게 아니라, 아이들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도록 메타버스가 무엇인지 먼저 배우고,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하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 단순히 메타버스를 활용할 줄 아는 디지털 역량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윤리적 문제까지 고민하고 공론화할 수 있도록 디지털 윤리 역량을 길러야 가능한 일이다. ‘아이들의 영역’이라는 이유로 방치하면 더 큰 사회적 문제가 벌어질 수 있다.” 」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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