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장관 바뀌더니 미래를 내다보는 '영험한' 국토교통부

김범주 기자 2022. 6. 4.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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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받아쓰기 기자들


1. 5월 30일 월요일 아침 7시 37분, 국토교통부가 출입기자들에게 보도자료를 하나 보냈습니다. 'GTX 확충으로 꼭두새벽 출근길 전쟁에서 해방'이란 제목이 달려 있었습니다. 아, 뭐 GTX 건설 속도를 높인다는 이야긴가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보도자료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보도자료를 보낸 시간이 아침 7시 37분인데, 14시에 그러니까 6시간 뒤에 원희룡 장관이 동탄역에서 지역주민과 만나는 미래를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기자 생활을 20년 넘게 하는 동안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미래를 내다본 보도자료'였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이런 문장이 이어집니다.


이런. 여섯 시간 뒤에 간담회에 참석한 주민이 어떤 말을 할지, 이미 모든걸 내다보고 있습니다. 사무실에 미래를 보는 유리구슬이라도 있는 걸까. 보통 영험한 공무원이 아닙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한 명이 아닙니다. 평택 주민도 여섯 시간 뒤에 있을 그 간담회에 참석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겁니다. 점입가경입니다. 그리고 원 장관은 또 이렇게 대답을 한다고 합니다.


보도자료는 친절하게 이런 당부를 또 담고 있습니다.


2.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포털사이트에 '원희룡 동탄'을 쳐보면 그대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실 겁니다. 5월 30일 오후 3시가 되자, 원희룡 장관이 동탄역을 방문했다는 보도가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아침 보도자료에 담긴 대로, 그 동탄 주민과 그 평택 주민이 원 장관에게 했다는 민원이 또 그대로 담겼습니다. '가상의 주민들' 발언을 빼고 보도한 언론들도 있었지만, 손에 꼽을 만큼 적었습니다.

설마 했는데 당황스러웠습니다. 소설로 지어낸 보도자료가 기사가 되는 일이 2022년에 실제로 벌어지다니요.

3. 다른 부처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6월 2일, 경제단체장을 만난 보도자료를 보시죠. 일단 만남은 오후 3시에 이뤄졌고, 보도자료는 한 시간 반 뒤, 4시 반에 배포가 됐습니다. 그리고도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이게 정상입니다. 실제로 이 날 경제계가 부총리에게 했던 주장은 오후 5시가 다 돼서, 기자들이 참석자들을 상대로 취재를 한 뒤에야 기사화가 됐습니다. 다른 부처들은 이렇게 일을 하고, 또 알리고 있습니다.

4. 그런데 국토부가 낸 '미래를 내다보는 보도자료'는 단 한 건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실수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 주 내내 이런 보도자료를 내놨습니다.

다음 날인 31일 화요일 아침 7시 33분에 보낸 보도자료입니다.


역시 일곱 시간 뒤에 벌어질 미래, 참석자들의 발언이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그 다음 날은 선거날이라 하루 쉬었습니다. 그런데 목요일, 이번에는 원희룡 장관이 전세사기 피해자를 만났다는 보도자료를, 10시 만남이 시작되고 2분 뒤에 보냅니다. 역시 또, 아마 아직 시작도 안했을 피해자의 말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은 역시 또, 기사가 됐습니다.

5. 좋게 보려고 노력하면, 정책을 새로 가다듬고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알려야겠다, 이런 조바심에 벌어진 일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잘못된 방법입니다. 현장 의견을 들으려면 제대로 들어야지요. 있지도 않은, 혹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렇게 생색을 내고 사진찍기용 행사를 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이라도 진짜 민심 행보를 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답을 낼 수 있을 겁니다.

기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리해야 될 기사가 수북히 쌓여있을 겁니다. 뻔한 보도자료는 빨리 처리하고 기획기사, 발굴기사 써야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최소한, 저 가상의 인터뷰들은 빼고 기사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보도자료를 내는 국토부에게 따끔하게 지적을 해야 됩니다. 자꾸 그렇게 기사를 내주니까 잘못된 자료를 계속 내놓는 것 아니겠습니까. 국토부의 잘못된 행태도 바뀌고, 기자들의 행태도 바뀌는지 주시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김범주 기자news4u@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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