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는 사람이 없다"..벼랑 끝 日 주류업계 살린 구세주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도쿄=정영효 입력 2022. 6. 9. 06:31 수정 2022. 6. 9.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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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에 음주인구 감소 '이중苦'
日 주류회사 살린 구세주 微알콜맥주
의외의 히트..아사히 '비어리' 매출 27%↑
'술 한잔에 시름 잊었다' 옛말
남성 애주가 비율 53% → 34%
미알콜·무알콜 주류 50여종으로 늘어
"'게코노믹스' 시장 3조로 커진다"

'이자카야와 애주가의 나라'라는 이미지와 달리 일본인의 절반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일본 최대 맥주회사 아사히맥주가 최근 일본의 20~60세 성인 8000만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다. '일상적으로 술을 마신다'고 대답한 사람은 2000만명에 불과했다. 특히 20~30대 젊은층의 금주율이 높았다.

'서버 큐리어스'라는 가치관이 확산하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술 취하지 않은'을 뜻하는 '소버(Sober)'와 '호기심이 강한'을 뜻하는 '큐리어스(curious)'를 합친 말이다. 이전 세대가 술 한 잔에 시름을 잊었다면 요즘 세대들 사이에서는 '취하지 않는 것이 멋있다'는 가치관이 대세라는 것이다.

 사라지는 20대 남성 애주가

1999년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에서 주 3회 이상, 한 번에 1홉(180mL) 이상의 술을 마시는 애주가 비율이 남성은 52.7%, 여성 8.1%였다. 2019년 조사에서 여성의 비율은 8.8%로 제자리인 반면 남성은 33.9%로 줄었다. 특히 20대 남성 애주가 비율은 34%에서 13%로 급감했다.

술을 안 마시는 일본인이 늘어날 수록 주류회사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주류회사들에 코로나19로 인한 매출 부진이 단기적인 위기라면 음주인구 감소는 생존을 좌우할 위험요소다.

위기의 주류회사가 생존을 위해 마련한 전략이 '술을 안마시는 일본인 나머지 절반을 술 마시게 하는 것'이다. 기존 주류시장의 2배가 넘는 규모의 시장을 새로 개척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이를 위해 일본 주류회사들이 내놓은 제품이 미(微)알콜 맥주다. 미알콜맥주는 알콜도수가 1% 미만인 맥주를 말한다.아사히가 작년 3월 처음 선보였다. 도수가 0.5%여서 '맥주스러운'이라는 뜻의 '비어리(Beery)'라는 이름을 붙였다.'

350ml 캔 가격은 214엔(약 2075원)으로 아사히의  대표 맥주인 슈퍼드라이(228엔)와 비슷한 수준이다. 알콜도수가 훨씬 낮은데도 가격이 비슷한 이유를 아사히는 독자적인 제조법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알콜도수가 0.5%로 떨어질 때까지 물로 희석하는 방식이 아니라 양조한 맥주에서 알콜만 제거하는 기술을 썼다.

아사히 관계자는 “그 덕분에 맥아의 감칠맛과 깊이를 살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작년 하반기 아사히는 미알콜 하이볼(위스키에 탄산수를 섞은 주류)인 '하이볼리'와 미알콜 스파클링 와인인 '비스파'를 추가로 내놨다.


작년 9월에는 일본 4위 맥주회사인 삿포로가 미알콜맥주 시장에 가세했다. 삿포로는 제품명을 '생맥주스러운'이라는 뜻의 '드래프티(Drafty)'로 지었다. 도수는 0.7%로 아사히 비어리보다 0.2도 더 높였다. 일본 주류업계가 2021년을 '미알콜맥주의 원년'으로 부르는 이유다.

미알콜·무알콜, 대용품에서 선택지로


일본에서도 ‘술도 아니고 물은 더더욱 아닌 미알콜 주류를 마시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라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미알콜 맥주는 예상 밖의 인기를 끌었다. 아사히는 2021년 12월 비어리 등 미알콜음료 매출이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27% 증가했다고 밝혔다. 매출 증가율이 10개월 연속 두자릿수를 이어갔다.

세계 3위 맥주회사인 아사히의 주류 매출에서 미알콜·무알콜 음료 비중은 7%까지 늘었다. 아사히는 2025년까지 미알콜·무알콜 음료의 매출 비중을 20%로 현재의 3배 가까이 늘리겠다고 밝혔다.  

산토리 역시 2008년 100만상자였던 미알콜·무알콜 음료 매출이 2021년 2500만상자로 25배 늘었다고 밝혔다. 미알콜 주류의 선전은 숨은 소비자층이 의외로 다양한 덕분이라고 주류회사들은 설명했다. 회식 자리에서 한 병 더 마시고 싶지만 다음날을 생각해서 더 마시기를 주저하는 소비자에게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일본 주류회사들에 따르면 '술을 한 잔도 못마시지만 칵테일 한 잔 하면서 바의 분위기에 젖어보고 싶다'는 젊은 여성들이 많다. 이들도 미알콜 맥주의 주고객층으로 가세했다.

술자리의 분위기는 좋아하지만 체질적으로 알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알콜도수가 0%인 무알콜 음료가 인기다. 무알콜맥주는 기본이고 무알콜 하이볼, 무알콜와인에 무알콜 사케, 무알콜 샹그릴라(와인에 과일즙을 섞는 스페인의 주류)까지 나왔다. 일본 최대 유통회사인 이온마트에서 팔리는 미알콜·무알콜 음료는 50여종까지 늘었다.

일본에서 무알콜맥주가 처음 판매된 건 42년전인 1980년이다. 지금까지 무알콜 맥주는 운전 임신 등의 이유로 마시고 싶어도 못 마실 때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음료였다. 최근에는 주류시장의 트랜드 변화로 소비자들이 찾아 마시는 음료가 됐다는 분석이다.

기린맥주는 최근 무알콜 맥주 브랜드인 '그린즈프리'의 디자인을 완전히 바꿨다. 기린맥주 관계자는 "맥주의 대용품에서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음료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시장 조사업체인 후지경제는 2010년 400억엔이던 무알콜맥주 시장이 2021년 986억엔으로 커졌다고 밝혔다. 작년 3월 무알콜 와인을 새로 내놓은 산토리는 2030년까지 무알콜음료 판매량을 현재의 2배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술 못마시는 '게코'를 잡아라


2020년 출판된 베스트셀러 '게코노믹스(ゲコノミクス), 거대시장을 개척하라'는 술 못 마시는 일본인을 타깃으로 하는 음료시장의 잠재력을 부각시켰다. '게코'는 일본어로 술 못 마시는 사람을 뜻한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이 술을 거절할 때 이 단어를 쓴다.

유명 작가이자 투자가인 저자 후지노 히데토는 "술을 안 마시는 게코들의 수요를 이끌어 내는 것으로만 3000억엔 이상의  거대시장이 생겨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본 주류회사들이 최근 미알콜·무알콜 시장에 힘을 쏟는 것도 '게코노믹스' 시장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란 분석이다.


외식업계도 게코노믹스의 시대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지난해 문을 연 도쿄 간다의 '로 논 바(Low-Non-Bar)'는 40종류의 무알콜 칵테일을 선보인다. 도쿄의 특급호텔인 친잔소도쿄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일 테아트로는 지난 4월부터 소믈리에가 요리에 어울리는 무알콜와인을 추천하는 페어링 서비스를 시작했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긴급사태가 모두 해제된 4월 이후 일본 주류회사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술 안 마시는 일본 성인들을 공략하고 있다. 아사히맥주는 오는 6월말 도쿄 시부야 중심가에 미알콜과 무알콜 음료를 전용으로 판매하는 바를 연다고 밝혔다. 젊은층에 미알콜·무알콜 음료의 인지도를 높이는 동시에 이 가게에서 인기가 높은 안주 정보를 거래 음식점이나 이자카야에 제공한다는 전략이다.

마쓰야마 가즈오 아사히 전무는 "지금까지는 술을 일상적으로 마시는 고객만 바라봤지만 이제부터는 술을 마시지 않던 4000만명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을 새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술을 안 마시던 일본 성인 전체를 주류시장으로 끌어들이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산토리그룹도 지난 4월28일부터 5월5일까지 도쿄역에 미알콜과 무알콜 음료 20종을 판매하는 오프라인 점포 '논알콜술집(のんある酒場)'을 한시적으로 열었다.

점점 술을 안 마시는 일본 사회와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일본인 전체를 애주가로 만들겠다는 주류회사들의 거대 프로젝트. 주류회사의 운명은 물론 일본의 사회와 문화가 이 승부의 결과에 따라 크게 바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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