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절망사 보고서]④ 약물·알코올 중독자 회복·재활 지원 필요.. "비난보다 다가가 손 잡아줘야"

최효정 기자 2022. 6. 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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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 "중독 끊어내기 위해선 고립 아닌 지지 필요"
"누구나 중독될 수 있어.. 낙인 말고 기회 줘야"
'다중 중독' 통합하고 지원체계 촘촘히 정비해야

‘절망사(deaths of despair)’는 반복되는 절망 속에서 삶에 대한 의미를 상실한 채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201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이 만든 표현으로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자살이 원인이 된 죽음을 포함한다. 현대 사회는 촘촘한 사회복지 시스템과 의료기술의 발전 덕분에 기대 수명이 증가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중년 백인의 사망률이 오히려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를 연구한 디턴이 절망사가 원인이라는 걸 찾아내면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했다. 절망사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선비즈는 한국 사회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자리잡은 절망사의 현실을 진단하고, 해결책과 대안을 고민해보고자 한다.[편집자주]

올해 44세인 사회복지사 A씨는 한 때 교도소를 몇 번이고 드나들던 마약 중독자였다. 삼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의 부재를 겪었고, 상실감을 먹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했다. 사춘기 무렵 그녀는 아버지를 떠나 어머니와 살게 됐는데, 어머니는 그녀를 오빠와 차별하고 구박했다. 폭식이 시작됐고, 살이 쪘다는 어머니의 비난을 피하려 구토를 반복했다. 체중에 대한 강박은 체중 감량 효과가 있는 마약에 손을 대게 했다. 식이 장애가 마약 중독으로 이어진 것이다.

약물 중독으로 망가져 가던 그녀를 살린 것은 아버지였다. 친오빠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된 그녀를 아버지는 묵묵히 보살폈다. 마약을 하다 진 빚을 그녀의 새출발을 위해 아버지가 몰래 갚아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더 이상 마약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멈췄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대학에서 중독재활학을 전공해 복지기관에서 마약 중독자의 회복을 돕는 일을 하게 됐다. 그녀는 스스로를 “회복자이자 중독자들의 회복을 돕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은 ‘불치병’으로 불린다. 중독자들은 약이나 술을 끊는 게 ‘죽기보다 어렵다’고 말한다. 중독이란 이미 의지나 통제를 벗어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각종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마약 범죄자의 재범률은 40%에 달하고, 알코올 중독은 88.1%가 3개월 이내 재발한다. 중독은 중독자의 인간관계를 파탄시키고, 사회적 낙인을 찍어 고립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중독자의 육체와 정신을 모두 소진시킨 뒤 자살이나 심장마비, 고독사 같은 죽음이 최종 종착지다.

알코올 중독 경험과 단주 이야기를 전하는 유튜브 콘텐츠. /유튜브 캡쳐

중독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회복을 위해서는 가족과 사회의 지속적인 지지와 연대가 필요하다고 증언한다. 자신의 중독 상태를 인정하고 일상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복은 약물이나 알코올이 주는 쾌락에 대한 갈망 대신 일상과 타인이 부여하는 안정감을 선택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A씨도 아버지의 보호와 사랑을 깨달은 뒤 약을 끊기로 결심했고, 중독재활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중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마약 전문 변호사인 박진실 법무법인 진실 변호사는 중독자들의 사회적 고립은 중독을 더 심화하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간다고 지적한다. 박 변호사는 “사회에서 준 절망감으로 약에 손을 댔는데 돌아갈 곳이 없을 때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면서 “죽음 직전까지 다녀온 친구들을 많이 봤지만 재활센터 등의 기관에서 따뜻하게 맞아주고 인간적으로 대해주면 다시 회복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문제는 중독자의 손을 잡아줄 치료기관이 국내에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는 중독자를 범죄자나 치료해야 할 질환자로만 인식해 처벌이나 격리를 강제한다. 중독을 금기시하면서 낙인을 찍고, 이는 중독자의 사회적 고립을 야기한다. 절망감에 중독이 심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재기를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가족마저 지지 대신 비난을 이어가니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약물을 투약할 수밖에 없다. 중독이 ‘절망사’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적절한 치료와 유대관계가 필수지만 국내에는 이런 역할을 하는 곳이 많지 않다.

학계에서도 중독자의 회복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며 관계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중독자의 재활과 회복을 위해서는 사회와 가족 등 타인의 끊임없는 지지와 중독자 간 유대를 통한 ‘자기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회복기 중독자 자조모임이나 마약 중독자의 재활을 돕는 시설인 다르크(DARC) 등 중독자 간 소통이 가능한 재활기관의 활성화가 절실한 이유다.

지난 15일 서울 중구에서 열린 A.A모임(단주 자조 모임)에 직접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알코올 중독으로 산산조각 난 삶이 A.A모임 덕분에 다시 한 조각씩 맞춰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40여년 간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던 B씨는 술 때문에 이혼까지 했다. 병원에 입원한 횟수만 100번이 넘는다. 삶이 산산조각 나있던 그를 살린 것은 A.A모임이었다. B씨가 미국에서 입원해 있을 때 A.A모임의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고, 심각한 중독도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는 현재 단주(斷酒)를 결심하고 6개월 째 A.A모임에 매일 출석하고 있다. 단주가 지속되자 딸들에게도 연락이 다시 오기 시작했다.

B씨는 “우리 모임은 애초에 알코올 중독을 불치병으로 전제한다”면서 “(모임의 존재를 알고 나서) 나 같은 사람들도 회복할 수 있구나. 나 같은 새끼들이 또 있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가장 크게 달라진 건 ‘관계’의 회복이다. 가족들이 단주 상태를 정말 좋아한다. 어머니와의 관계도 좋아졌고, 딸들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석자 C씨는 “병원 입원이 제도나 시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단주하는 것이라면 A.A모임은 본인의 단주 의지가 있어야 올 수 있다. 모임에 오기 전까진 내가 술을 마시면 반사회적인 인간이 된다는 자각조차 없었는데, 이곳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잘못에 대한 지각이 생겼다”면서 “하루하루 버텨 나가면서 사고를 안치고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회복이 아니겠냐”라고 말했다.

사업에 실패하고 이혼한 뒤 알코올 중독에 빠진 D씨는 4년간의 노숙생활을 이어가다 다른 노숙인의 죽음을 목도하고 한 보호센터를 직접 찾아갔다. 그는 지난 세월 여러번 재활에 실패했지만, 보호센터의 도움으로 장사를 시작하겠다는 목표가 생긴 뒤 단주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중독자들의 재활을 위해서는 성취감과 삶의 동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픽=이은현

전문가들은 중독자를 격리하기보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재활과 자활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독자의 사회 생활을 금기시하는 시각을 버리는 것이 우선이다. 중독자에 대한 색안경부터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중독에 대한 이해를 위해 청소년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술에 대한 관대한 인식이 중독을 조장하는 측면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박 변호사는 “우리 사회는 중독에 대해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만 여긴다. 심지어 연예인 등이 마약 전과가 있으면 사회에 다시는 나오지 말라고 폭언을 한다. 중독자들은 음지에만 살아야 하나.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면서 “누구라도 절망을 느낄 때 약물에 손을 댈 수 있는 것이고 한 번 실수한 사람이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비난이 아닌 박수를 쳐주어야 한다. 그들이 양지에서 같이 살아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말했다.

중독에 따른 절망사를 막기 위해서는 중독자들에 대한 사회복지 시스템도 보다 촘촘히 재구성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사회복지 시스템 자체를 밑바닥부터 손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의 사회복지 시스템은 소득을 기준으로 짜여져 있기에 중독자에 대한 지원이 마땅치 않다. 재활이나 자활에 드는 비용을 개인이 모두 부담해야 하는데, 가족과 관계가 소원해진 중독자들의 경우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지원을 받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도 정부의 마약류 중독자 치료비 지원을 위한 연간 예산은 1억원 안팎에 불과하다. 정부의 지원 부족은 중독자를 살릴 ‘골든타임’을 놓치게 만든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외국 사례를 보면, 취업활동을 하다가 문제를 겪는 사람은 의료보험을 통해 중독 치료를 돕고, 연금공단이 재활이나 자활을 위한 훈련비용을 대준다. 만약 취업활동을 안 한다면 지자체에서 재활을 지원한다”면서 “한국은 치료나 재활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고, 정부 지원도 저소득층만 받을 수 있기에 중독자가 절망에 더 쉽게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절망사를 막기 위해서는 사회복지체계를 더 촘촘히 다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중독을 극소수의 문제로 분절해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전체의 문제로 통합해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알코올 중독이 약물 중독으로 이어져 자살에 이르거나, 반대로 약물 중독이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한국은 약물과 알코올 중독, 자살 문제를 따로 관리하다 보니 체계적인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전덕인 한림대성신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중독은 다중으로 일어나고, 자살과 연계성이 높지만 국내에는 중독 전담 병원도 드물고, 있더라도 한 가지 중독만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국가에서 중독병원을 만들어서 이를 통합해서 관리하고, 자살도 중독 문제와 함께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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