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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의 돌발史전] 삼별초는 정말 제주도에서 전멸했을까?

유석재 기자 입력 2022. 06. 24. 00:00 수정 2022. 06. 2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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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배후, 일본과 오키나와
제주 항몽유적지에 전시된 삼별초의 마지막 전투 기록화.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본 적 있습니다. 고려 후기의 명장으로 이름 높고, 1970년대 계몽사 ‘한국전기전집’에도 위인으로 실렸던 김방경(1212~1300)을 비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몽골 침략군과 한편이 돼 삼별초를 공격하다니 나쁜 사람 아니냐’는 얘기였습니다.

글쎄요. 삼별초를 ‘대몽항쟁의 주체’로 보자면 분명 김방경은 ‘침략자와 한편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역사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김방경은 고려 조정의 신하였고, 그들의 입장에선 삼별초가 반란군이었습니다. 이건 안중근 의사가 동학 토벌에 나섰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봐야 합니다. 13세기에 살았던 김방경에게 20세기 이후의 민족주의적 시각을 주입시키지 않는 이상, 김방경은 분명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인물이었습니다.

제주 항몽유적지의 삼별초 역사문화장터. /뉴시스

삼별초 얘기를 하게 된 것은 최근 제주도가 제주시 애월읍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에서 ‘삼별초 역사문화장터’를 연다는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6~7월과 9~11월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 장이 선다는데, 물론 국내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하필이면 이곳 ‘항몽(抗蒙)’ 유적지에 몽골식 천막이 즐비한 위 사진을 보면 뭔가 아이러니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군요.

해변이 아름다운 애월은 제주도에서도 운치있는 음식점과 카페가 많아 코로나가 한창일 때도 발디딜 틈 없던 곳입니다. 저는 지난해 제주올레길 15-B코스를 걷다가 애월 해변을 지났는데 주차할 곳 없는 자동차들이 줄지어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어요. 두 발로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오며 역시 걷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주도는 이곳 항몽유적지를 대체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세기 말 원나라 침략에 맞서 끝까지 항거한 고려 무인의 정서가 서린, 삼별초군의 마지막 보루다.’ 이것은 제주 애월이 바로 삼별초군이 궤멸된 장소라는 뜻입니다. 삼별초란 본래 무신정권 후기 권력을 잡은 최씨 정권의 사병이었습니다. 재래식 전투의 용병이 대개 그렇듯, 몽골이 고려를 침입하자 정규군보다 더 뛰어난 전투력을 보이며 활약했습니다.

삼별초의 주요 격전지였던 전남 진도의 용장산성. /조선일보DB

강화도로 피란을 갔던 고려 조정이 몽골과 강화를 맺고 1270년(원종 11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삼별초에 해산령을 내리자, 삼별초는 반기를 들었습니다. 삼별초를 이끈 배중손은 진도 용장성을 거점으로 삼고 왕족인 승화후 왕온을 임금으로 세웠습니다. 새로운 정부를 세운 셈이지만 고려 조정의 입장에선 참칭(僭稱)이었을 뿐이겠죠.

1271년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과 몽골의 연합군이 용장성을 점령했고, 살아남은 삼별초는 제주도로 옮겨 항전을 계속했습니다. 이때 삼별초가 방어를 위해 축조한 성이 제주도 해변 곳곳에 남아 있는 환해장성(環海長城)입니다. 그러나 삼별초는 1273년 전선(戰船) 160척에 탄 여몽연합군 1만 명의 공격을 받고 3년 만에 ‘진압’됩니다. 750년 전 애월 해변은 피로 물들었을 겁니다.

애월의 항파두리성은 대단히 쓸쓸한 곳입니다. 궤멸의 날, 삼별초를 이끌던 김통정은 자결했고 휘하 부장 70명은 붙잡혀 참수됐으며 남은 1300명은 포로가 됐습니다. 그토록 무인(武人)의 기개를 보였던 그들은 정말 이곳에서 모두 사라졌단 말인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진도에서 또 제주도로 건너갔듯이, 또 다시 바다를 건너 갈 곳은 정녕 없었단 말인가?

여기서 두 가지 가능성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다 건너 일본.

삼별초의 주력군이 아직 진도에 있던 1271년 9월,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관료들은 ‘고려’에서 온 국서를 받아들고 당황했습니다. 분명 3년 전만 해도 고려 국서는 몽골에 대해 호의적으로 서술했는데, 이번 국서는 ‘야만적인 적’으로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몽골에 맞서 싸울 병력 수만 명을 요청하기까지 했던 겁니다.

이 국서는 지금 전해지지 않지만, 희한하게도 일본의 한 외교 실무자가 이 국서에 대한 의문점을 조목조목 적어 놓은 문서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1977년 도쿄대 사료편찬소에서 발견된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입니다. 이 문서에서 언급된 국서는 개경에 있는 ‘원래’ 고려 조정이 아니라 진도에서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받든 삼별초 세력이 보냈던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이 국제 정세에 어두웠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만약 삼별초와 일본의 연합 전선이 정말 성사됐더라면? 역사에 가정(假定)이 있을 수 없겠습니다만, 동아시아의 역사가 크게 바뀔 수 있었을 거라는 가능성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지막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오키나와입니다.

이야기는 15년 전인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탐라와 유구(琉球·류큐) 왕국’ 특별전을 준비하던 국립제주박물관의 민병찬 학예실장(현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은 오키나와에서 대여받은 13~14세기의 수막새 유물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수막새란 수키와가 이어진 처마 끝을 장식하는 기와입니다. 이걸 본 이들의 반응이 이랬습니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전남 진도의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고려 13세기 수막새(왼쪽)와 오키나와의 13~14세기 수막새(오른쪽). /국립제주박물관

분명 오키나와에서 온 기와인데, 국립제주박물관이 소장한 우리나라의 13세기 어떤 기와 유물과 흡사하게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둥근 원 주위로 연꽃 잎들이 새겨졌고 테두리엔 연속적인 점 무늬가 있는 모습. 그런데 그 ‘우리나라 기와’란 어디서 나왔던 것일까요.

진도 용장산성이었습니다. 바로 삼별초의 항전지 말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오키나와에서 온 유물 중 한 암키와에는 (친절하게도) 이런 글자까지 새겨져 있었습니다.

‘癸酉年高麗瓦匠造(계유년고려와장조)’.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는 것이죠. 계유년? 아,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진압된 1273년이 바로 계유년이었습니다.

이제 이런 주장이 학계에서 나왔습니다. ‘삼별초 세력은 제주도에서 모두 궤멸된 것은 아니었다. 진도와 제주도에서 남쪽으로 배를 타고 떠났던 삼별초 세력의 일부가 오키나와로 이동해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했을 수 있다.’

삼별초가 한국사 기록에서 사라진 12세기부터 오키나와에는 비로소 농경이 본격화되고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으며 곳곳에 큰 성도 축조됐다는 점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오키나와의 고려 기와 장인은 삼별초 세력의 일원이었고, 이들이 주도한 대형 건축 공사가 정치적 공동체를 출현시켜 1429년 류큐 왕국의 기초를 이뤘던 것은 아닐까…’

제주도에서 700~800㎞ 떨어진 오키나와는 의외로 배를 타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장한철은 1770년(영조 46년) 12월 25일 제주항을 출발했다가 풍랑을 만나 조난당했는데, 불과 3일 만인 28일에 오키나와의 호산도(虎山島)에 도착했다는 겁니다.

물론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갔다는 얘기는 물론 아직까지는 가설일 뿐입니다. 확실한 팩트는 대략 삼별초의 활동 시기에 오키나와에 건너간 고려 장인이 고려풍 기와를 만들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항몽유적지에서 느끼는 그 모든 쓸쓸하고 아쉬운 감정이, 그리고 그들이 그곳에서 아주 궤멸된 것이 아니라 오키나와로 일부 탈출했을 가능성을 그려보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삼별초에 대해 가지는 지나치게 우호적이고 동정적인 태도 때문인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고려시대사 전공자인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외세와 싸웠다는 것만으로 ‘민족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무인정권에 기생하며 각종 특혜를 받고 백성들의 항쟁을 억압하는 역할을 했던 군사조직이 무인정권 붕괴 이후 갑자기 ‘민족적’인 군대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인가? 최씨 정권의 항전론이 국가 안보를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정권 유지를 위한 것이었는가를 구분했던 것처럼, 삼별초의 항쟁 역시 항쟁의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엄정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역사란, 그리고 역사의 해석이란 결코 간단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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