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아오지 탄광서 총살된 국군포로 '9214313'.. 살아서 귀환 못해 '추정포로'로 남아

이학준 기자 2022. 6. 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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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보병사단서 북한군과 싸우다 국군포로된 고 이재암씨
아오지 탄광서 수십년 노역하다 북한군에 총살
살아서 귀환하지 못했다고.. 지원도 차별 받는 '추정포로'

“아오지 탄광에서 일하고 온 아버지와 함께 ‘벤또밥’을 먹을 때면 아버지는 항상 자신의 고향이 경북 성주군 월항면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에 가면 우리는 ‘영웅의 자식’이라고, 한국 사람들이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고 환영해준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죽어서 못 가면 너희들이라도 고향에 가야 한다’며 자신의 군번 ‘9214313′을 외우라고 했습니다.”

6·25 전쟁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포로가 된 고(故) 이재암씨의 딸 이순금(61)씨를 만난 건 지난 16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근처 한 카페였다. 이씨는 이날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국군포로 유가족 지위 인정을 촉구하는 집회에 참석했다.

이씨는 자신의 아버지를 소개할 때 이름보다 아버지의 군번인 ‘9214313′을 강조했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군번만 대면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아버지 말을 믿고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군번 9214313은 ‘국군포로’가 아닌 ‘추정포로’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 땅에서 눈을 감은 아버지를 대신해 이씨는 군번 9214313의 정당한 지위를 얻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지난 16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근처 카페에서 만난 6.25전쟁국군포로유족회 이순금씨가 인터뷰 도중 눈물을 닦고 있다./김수정 기자

이재암씨는 24살이었던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제5보병사단에 징집돼 북한군과 맞섰다. 그러나 정전협전이 체결되기 직전 북한군의 포로가 됐다. 배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인민군 병상이었다고 한다.

이재암씨는 북한 아오지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함께 있던 국군포로들이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하자 곧바로 총살되는 모습을 보고 고향에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재암씨는 40여년 동안 포로의 신분으로 아오지 탄광 갱도에 들어가 일했다.

국군 이재암씨를 상징하는 숫자는 군번인 9214313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43호’로 불렸다. 국군포로의 경우 고민증(주민등록증) 이름 앞에 숫자가 붙고 철저한 감시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이순금씨는 “이재암이 아닌 ‘43호’로 불렸다”며 “북한 당국은 우리 아버지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43호 딸이니까 연좌제로 탄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며 “언니와 남동생 모두 탄광에 들어갔고, 나는 운 좋게도 비료공장으로 갔다”고 했다.

이재암씨는 북한에 억류돼 있으면서도 오로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만 했다고 한다. 이순금씨는 “아버지가 집에만 오면 우리를 앉혀놓고 ‘아버지 고향은 어떤 곳이다’ ‘고향에 가면 훈장을 가슴에 달아주고 영웅이라고 환영해 준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계속해서 ‘10년이면 조국이 통일된다’고 했지만, 통일이 되지 않았다. 이후 10년이 지나도 통일이 되지 않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재암씨는 1996년 7월 모진 노동 착취를 견디며 평생을 그리워했던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아오지 탄광 인근 공설운동장에서 북한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이재암씨 아들이 친구들에게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이 발각됐기 때문이다. 이순금씨는 “누군가 나를 차에 실은 뒤 내려준 곳이 총살 장소였다”며 “한참 있다 총살당하는 사람이 왔는데, 그게 아버지와 남동생이었다”고 했다. 이순금씨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아 쓰러졌고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총살당한 것만 생각난다”고 덧붙였다.

6.25전쟁국군포로유족회 이순금씨 아버지 이재암씨의 훈장증. /이순금씨 제공

이후 이순금씨는 북한 라진을 거쳐 탈북에 성공했다. 그는 중국을 거쳐 2010년 한국 땅을 밟았다.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아버지의 군번을 댔다. 아버지가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했던 훈장이 나왔고, 위로지원금도 4700만원이 나왔다.

그런데 한국에서 아버지는 온전한 ‘국군포로’가 아니었다. 한국 정부는 이재암씨를 ‘국군포로’가 아닌 ‘추정포로’로 불렀다. 이유는 하나였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군포로가 살아서 귀환하면 국군포로로 등록하고 최대 5억원까지 지원금이 나온다. 하지만 이재암씨처럼 한국에 귀환하지 못하고 북한에서 사망하면 ‘추정포로’로 분류된다.

이순금씨가 매일 용산 전쟁기념관 앞으로 나오는 이유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명예의 문제라고 이들은 말한다. 북한에서 사망한 국군포로도 한국에 귀환한 국군포로와 똑같은 대우를 해달라는 게 이들의 요구다. 6·25 전쟁 국군포로 유족회 관계자는 “우리 아버지들은 전역하지 못한 채 북한 땅에서 사망했다는 이유로 정당한 예우를 해주는 법이 없다”면서 “살아서 귀환한 국군포로는 모두 명예롭게 전역했는데, 북한 땅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전역하지 못하고 군인 신분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우리 아버지들은 도대체 이 나라에 어떤 존재인지 묻고 싶다”고 했다.

우리 정부의 입장은 어떨까. 국방부는 현행법으로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방법은 없다는 입장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국군포로로 인정받으려면 한국에 귀환해서 국군포로였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며 “귀환하지 못한 이들은 자녀들의 주장에 따라 ‘국군포로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추정포로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올해는 6·25 전쟁 발발 72주년, 정전협정체결 69주년이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는 5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측에서 한국에 인도한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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